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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컬처]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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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컬처]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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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L의 책을 만들고 있다. 그가 친구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의 글이 좋아서 그의 책을 만든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2년 전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이미 그에게, 네가 글을 쓴다면 나는 너의 책을 만들게, 하고 말해 두었다. 나는 그의 삶과 사유를 좋아한다. 여러 작가들을 만나보는 동안 생긴 나름의 믿음이 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는 것이다. 좋은 글이라는 건 유려한 단어와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삶에서 기인한다. 나도 스스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면 쓰고 싶은 글이 많아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한 줄도 쓰지 못하거나 누구에게도 가서 닿지 못할 글을 쓰거나 한다.


지난주에 책의 본문 교정이 거의 마무리됐다. 나는 L에게 물었다. 혹시 이 책에 바라는 점이 있느냐고. 사실 원고를 보낸 이후에 작가가 해야 할 일이란 거의 없다. 자비출판이 아닌 경우 출판사가 모든 비용을 감당하게 되니까 표지나 판형이나 가격을 결정한다든가 추천사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도 대개는 출판사의 몫이다. 그래도 그의 마음에 꼭 맞는 책을 만들어 주고팠다. L은 나에게 답했다. O작가에게 추천사를 받는 게 소원이라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백석 시인과 그 작가의 글을 보면서 살아왔다고, 그 두 사람의 글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이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백석에게 추천사를 받아달라고 하면 어차피 돌아가신 분이라는 핑계라도 있지, O작가는 백석의 시대에 살았다면 백석만큼 유명했을 분이었다. 내가 어느 자리에서든 만나본 일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그래도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서 "어렵겠지만 추천사 제안을 보내볼게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제 O작가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다. 알고 지내는 작가들에게 수소문해서 간신히 메일 주소를 받았다. 어느 한 부분을 살짝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추천사 기한은 O작가님께서 보내주시는 날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분량도 자유롭게 써 주십시오. 한 줄을 보내 주시면 띠지에 얹고 세 줄을 보내 주시면 책의 뒤표지에 넣고 더 길게 보내 주시면 본문에 수록하겠습니다. 언제 보내 주시든, 저도 이원재 작가도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우리 둘은, 그때부터 어린아이가 됐다. 수신 확인을 언제 하실 것인가, 혹시 하지 않으시는 게 아닐까, 그래 그만큼 바쁘시겠지, 아니 그래도 확인은 해 주셔야지, 등등, 복잡한 마음을 서로 주고받았다.

누군가에게 메일을 보내고 이렇게 기다려보기란 오랜만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도 수십 건의 추천사 청탁 메일을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원고, 강의, 출간에 이르기까지 메일로 많은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메일 알림이 뜬 것을 보고도 수신확인을 늦게 하거나 일이 바쁘단 핑계로 답장을 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 상대편도 바쁘다고 이해해 주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어제는 L과 함께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서로 마음이 쪼그라들어 잠들었다.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다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뭐라고.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메일을 확인하고 4시간 내로 답장할 수 없다면 24시간 이내에 보내겠다고 짧게라도 답장하는 것이 비즈니스 매너라고 언젠가 들었다. 그런 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간절한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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