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이 쏘아 올린 국립근대미술관 건립 추진
국내 미술계 인사 400여명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발족
일제식민지·내전·문명의 서세동점 경험한 '근대' 표방한 국립미술관 없어
삼성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한국 근·현대미술품 1369점
근대기 유명 작가 작품 골고루 포함
미술관 건립부지로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와 세종로 소재 정부서울청사 추천
[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정부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 관련한 미술관 건립안을 다음달께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어떤 미술관이 탄생할지 미술계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삼성가(家)와 맺은 인연을 강조하거나 ‘수도권 대 지방’이라는 이분법으로 유치전에만 혈안이 돼 있다. 한국 미술사적 관점에서 진중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미술계에서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에는 ‘근대(modern)’를 표방한 국립미술관이 없다. 1969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인 덕수궁관에서 근대미술을 관리한다. 덕수궁관은 3개층에 전시실이 4개뿐이다. 하나뿐인 1층 수장고도 크기가 작아 보존·복원보다 오로지 전시에 집중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미술계의 한 인사는 "부모(근대)가 자식(현대) 집에서 셋방살이하는 미술관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혀를 찼다.
해외의 선진 미술관은 다르다. 주요국들은 전근대(pre-modern)·근대·현대(contemporary)·당대(temporary)의 시대 구분을 명확히 해 관리한다. 프랑스의 오르세, 영국의 테이트 브리튼, 일본의 국립근대미술관, 독일·이탈리아의 20세기미술관이 대표적인 근대미술관이다. 이들 미술관은 자국 고유의 근대기를 확립하고 이 기간 탄생한 미술품의 수집·보존·연구·교육·전시·교류에 힘쓴다.
한국 미술사에서 ‘근대’로 일컬어지는 시기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19세기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다. 이 기간 한국의 역사는 일제식민지와 내전, 문명의 서세동점이라는 격동을 경험했다. 이 같은 시대상이 반영돼 한국 근대미술품에는 저항정신을 담거나 서구식 기법 차용으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작품이 많다.
삼성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한국 근·현대미술품은 1369점이다. 작가 수는 238명으로 박수근(1914~1965), 장욱진(1917~1990), 권진규(1922~1973), 유영국(1916~2002) 등 근대기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고루 포함돼 있다.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의 ‘화녕전작약’(1930년대), 이중섭의 스승이기도 한 여성 화가 백남순(1904~1994)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 ‘낙원’(1937), 총 4점만 전해지는 김종태(1906~1935)의 유화 가운데 하나인 ‘사내아이’(1929)는 그동안 미술계에서도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근대미술품이다.
미술계에서는 삼성가의 이건희 컬렉션 기부가 국립근대미술관을 탄생시킬 역사적 기회라며 정부가 적극 나서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 단색화 거장 박서보와 서승원·한만영·김택상 등 국내 미술계 인사 400여명은 전날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정식 발족했다. 이들은 삼성가에서 기증한 근대미술품 1000여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유 중인 근대미술품 2000여점까지 한데 모아 국립근대미술관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임에 참여한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한국이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이 시기 문화를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바람에 그 전후에 나타난 우리의 근대미술마저 자기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이제라도 국립근대미술관을 지어 우리의 근대를 새롭게 정의하고 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평론가인 김복기 경기대 교수는 "남북 관계에서도 근대미술이 하나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며 "지금 남북한의 미술은 서로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간극이 벌어져 있는데 현대의 이질성을 근대의 동질성으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국립근대미술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모임은 국립근대미술관이 들어설 부지로 최근 서울시에 소유권리가 넘어온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와 세종로 소재 정부서울청사를 추천했다. 부지 선정은 제주도김창열미술관을 설계한 홍재승 홍익대 겸임교수가 주도했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고유가 지원금 받아도 1인당 30만원 또 준다…18일...
송현동 부지는 최대한 원형을 살려 공원으로 사용하되 지하 활용 방안이 거론됐다. 서울시가 송현동 부지의 지하사용권을 국립근대미술관(정부)에 무상으로 제공하면 국가가 정부예산으로 건축비를 부담해 미술관 건립에 나서는 방식이다. 지하에 면세점을 마련하고 이를 20년간 사용하는 조건으로 민간이 건축비를 부담하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정부서울청사의 경우 총 19층 가운데 10개 층을 상하로 터서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모임은 현재 전국 각지에서 유치 경쟁을 벌이는 이른바 ‘이건희 미술관’과 관련해 옳은 방식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정준모는 "이건희 컬렉션의 분포를 보면 고미술에서 회화, 조각, 판화 등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며 "이걸 종합선물세트처럼 한꺼번에 모으면 박물관도 미술관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형태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