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택시기사의 멱살을 잡아본 일이 있는가? 주변에 누군가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지인 한 명 정도 찾아내 실토를 받아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어쨌든 상당히 드문 일인 건 분명하다. 평생 한 번이라도 망자를 '걔'라 지칭한 적은 있는가. 그것도 '위험의 외주화'라는 구조적 재해에 희생된 19살 청년의 죽음을 두고서 말이다. "못사는 사람들이 미쳤다고"라는 표현은 또 어떤가.
각각 이 정부 법무부 차관과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했다는 저 언행 밑에 흐르는 본심을 아시타비(我是他非) 혹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말로 정의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온전하지 못하다. '모두가 용이 될 필요 없다'거나 '아파트 환상은 버리라'라는 또 다른 고위 공직자들의 말, 동기의 선악을 떠나 그 면면을 관통하는 정서는 다름 아닌 약자를 향한 혐오다. 나보다 적게 가졌거나 못 배운 사람들을 향한 경멸. 저급하고 열등하며 냄새나는 인간들이라 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 사회적 약자의 멱살은 잡혀도 상관없는 멱살이며, 죽음 앞에서조차 의당 갖춰야 할 예의 따윈 불필요하다는 생각. 이것이 혐오가 아니면 무엇인가.
물론 이 정부 사람들만 그런 건 아니다. 저잣거리 노인들이 악수하자며 달려들자 본능적으로 손을 감춘 전(前) 대통령을 비롯해 힘 있는 자들의 약자 혐오 사례는 진영을 떠나 즐비하다. 내가 월급을 주고 돈을 지불했다면, 물컵을 던져도 팔을 잡아 내동댕이 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갑(甲). 그들에게서 불현듯 튀어나오는 말과 행동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내면화돼 있는 천박한 선민의식 그리고 약자를 향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버젓이 장·차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세상에서 친구의 아파트 평수를 따지는 아이들을 우리는 나무랄 수 있을까. '니가 가라 공공임대'라는 야당 정치인의 말은 정부를 헐뜯기 위한 단순한 구호를 넘어, 성벽 안쪽에 사는 '빵투아네트'를 향해 평범한 이들이 내지를 수 있는 가장 소극적 반항으로 들린다.
혐오는 바이러스와 닮아 숙주가 있는 한 무한 증식한다. 구의역 승강장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숨진 1997년생 청년을 향해 "걔만 신경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는 변창흠 국토부 장관 후보자의 혐오 바이러스는, 청년과 비슷한 또래인 자신의 장녀에게 전파돼 '개나 소나 붙은 것 같은' 기분으로 표출됐다. 변 후보자의 장녀는 과거 서울시 글로벌리더 양성 프로그램에 합격하자 자신의 블로그에 "같이 면접 본 애, 학원에서 같은 반 친구도 합격했다"라고 쓰면서 '개나 소'를 언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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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뒤에 덧붙인 '그래요, 나 못됐어'라는 글귀에 더 눈길이 간다. 덜 배우고 덜 가진 자들이 그렇게 된 건 노력하지 않았거나 능력이 없던 탓이며 고로 그들을 혐오하는 일은 성과주의·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여기는 세상, 그런 세상만은 만들지 말자는 게 이 정부 사람들이 추구한다는 가치, 달리 말하면 공정이나 정의 같은 것 아니었나.
혐오는 가장 치명적인 결격 사유다. 그들에게 어떤 희한한 능력이 있어 기필코 장·차관에 앉혀야만 검찰이 개혁되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설령 그렇다 해도 혐오주의자가 문제없이 고위직에 오르는 사회적 경험을 없애는 일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멱살 차관 없어도, 혐오주의자 장관 아니어도, 검찰총장을 괘씸죄로 벌줄 수 있고 어차피 실패할 25번째 부동산 정책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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