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2020년 12월의 한국 - 혼군(昏君)이 된 선군(善君)
1.
이번 정부가 들어선 첫해인 2017년 겨울 새벽 서해바다에서 낚싯배가 침몰합니다. 다음날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시작하기 전, 대통령은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고를 막지 못한 것과, 또 구조하지 못한 것은 결국 국가의 책임이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책임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비판적인 언론들은 세월호 사고에 고마움을 느끼는 새 정부가 이번 사고에 매우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건설현장 안전관리 경험이 있는 저는 이 기사를 읽고 ‘앞으로 어쩌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에 수십명씩 사망하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국가가 무한책임을 진다는 것도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더 난감한 것은 앞으로 어떤 기준으로 묵념 여부를 결정할 것인지입니다. 울고 싶어도 참고, 웃고 싶어도 참는 게 왕의 자리입니다. 이후에도 각종 안전사고가 이어졌지만, 청와대 묵념에 대한 기사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세월호 조사를 9번째 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나랏돈이 650억원 들어갔다 합니다. 무한책임을 지는 게 이렇게 힘든가 봅니다. 세월호 사고가 난 다음 해 6월, 중국에서도 400여명이 사망한 유람선 침몰사고가 났습니다. 리커창 총리가 현장구조를 지휘하고 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기사화되지 않았습니다. 인민(人民)의 나라에서 벌어졌던 일입니다.
2.
집안이나 기업이나 나라나 살림살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살림 잘하는 주부는 애들 학비하고, 언제 생길 지 모르는 목돈 들어갈 일에 대비해서 늘 돈을 챙겨 둡니다. 회사도 그렇습니다. 다음 제품 생산을 위한 연구개발에도 투자해야 하고, 시장이라는 게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늘 유보금을 확보해 두는 것이 잘 나가는 회사 경영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이 무너지면 회사는 빚더미에 올라 앉습니다. 회사가 유보금을 많이 갖고 있으면 세금을 물리는 방법으로 투자를 압박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투자를 하다가 적자가 나면 세금으로 메워준다는 말은 못 들어봤습니다. 국가도 그렇습니다.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정책을 펴서 사람이 먼저인 나라를 만든다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을 풀어왔습니다. 지난 해 저소득층 수입의 거의 절반이 정부 지원이라고 합니다. 주머니가 비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패배감과 의타심은 지난 반세기 쌓아 올린 자조자립(自助自立)의 정신을 망가트릴 수 있습니다.
마중물은 티도 안 나게 없어졌는데 본물이 나오기도 전에 코로나가 닥쳤습니다. 정말 목돈을 풀어야 할 일이 생긴겁니다. 정부 예산은 2018년도부터 매년 약 40조원씩 증가했습니다. 올해는 당초 512조원이었는데 코로나 사태 등으로 34조원 가량 늘어서 545조원이 들어갔습니다. 내년에 쓸 정부예산 558조원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제까지의 초(超)예산을 넘어 ‘초초예산’이라고 쓴 신문도 있습니다. 내년도 적자국채는 94조원 가량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3.
지난 16일 검찰총장 징계와 관련하여 청와대는 "검사징계법에 따라서 법무부 장관이 징계 제청을 하면 대통령은 재량 없이 징계안을 그대로 재가하고 집행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조직에는 위임전결 원칙이 있습니다. 맨 윗사람이 혼자 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부하들에게 권한을 일부 넘겨주게 됩니다. 그리고 부하에게는 보고의 의무가 지워집니다. 그러나 상사는 권한은 넘겨주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회사에서 본부장이 전결한 사항이라도 고객에게 손해를 입혔다면 법에서는 회사나 대표이사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책임”이라던 착한 대통령은 지난 21일 열린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정부의 코로나 백신 확보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문제를 지적하면서 참모들과 내각을 질책했다고 합니다. 영(令)을 거역한 신하는 목을 쳐야 하는 것이 왕의 할 일입니다. 야단을 쳐도 영이 서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의 틀에 큰 고장이 있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
2005년에 타계한 하버드대 로버트 하일브로너 교수는 평생 자본주의의 흐름을 공부했고,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옹호했던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이었습니다. 그가 쓴 책 ‘한번은 경제공부(Economics Explained)’의 끝부분에서 노학자는 이 시대 나라를 끌고 갈 지도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습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항상 불안할 정도로 긴장 상태에 놓여있고, 끊임없이 변동하며 불균형 상태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 변화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혁명적이다. 끊임없이 창출되는 변화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면에서 변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사회제도는 이제까지 없었다. 대규모 변화에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혁명성에 대한 적응만이 아니다. 국민적 기질이라든가 지도자의 통찰과 같은 제도 밖의 존재들이 기여하는,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것들도 필요하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어질고 덕이 뛰어난 왕은 성군(聖君)이라 하는데, 착한 왕, 즉 선군(善君)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된 왕 중에도 속내는 착한 사람도 있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착하다’는 단어는 ‘왕’ 앞에 붙여 쓸 단어가 아닌가 봅니다. 착한 왕은 없다는 것을 왕도 알고 백성들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리에 어두운 왕은 혼군(昏君)이라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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