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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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바꿀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온을, 바꿀 수 있는 일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바꿀 수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하는 지혜를 저에게 허락하소서.” 이는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의 짧은 기도문이다. 읽는 이의 경외심과 감동을 자아내는 명문장으로, 아름다운 논리구조가 일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5월 취임사 다음 문구는 또 어떤가 “(새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영감 가득했던 이 정치적 선언은 당시 국민에게 삶의 의욕을 한껏 북돋아줬다. 아름답기로는 니부어의 기도문에 뒤지지 않건만, 3년6개월이 지난 지금 이 선언에 가슴 뛰는 국민은 과연 몇이나 될까.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스승이던 앨프리드 마셜의 명언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을 떠올려보자. 경제학자가 올바른 정책을 만들어내려면 모름지기 머리(이성)와 심장(감성)을 둘 다 조화롭게 갖춰야 한다는 말씀이다. 좀 더 확장하면 이성·과학의 영역인 정책과 감성·철학의 영역인 정치 이념이 적절히 상호작용해야 바람직한 공공 정책이 나온다는 뜻이다. 사실, 지난 수년간 문재인 정부의 ‘뜨거운 심장’(정치 이념)은 ‘차가운 머리’(정책 전문성)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아니 도움을 아예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공공 정책이 하나라도 가능했겠나.

일국의 정부 수반이 지향하는 정치 이념은 공공 정책의 자연스러운 길잡이가 된다. 다만 정책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전문성에 있다. 정책이 정치와 차별화돼야 하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의 3년6개월이 가져온 오늘 우리 사회의 총체적 난맥상은 한마디로 ‘공공 정책에 대한 정치의 횡포’ 탓이다.


우선, 문 정부의 간판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은 실증적 전제부터 취약했고 아전인수 격 논리에다 성과도 지금껏 미미하다. 지난달 국정감사에선 통계조작 시비에 휘말렸다. 최저임금을 급속히 끌어올리고 무분별한 복지지출을 늘리겠다는 분배지상주의적 이념 이외에는 데이터에 입각한 실증도, 과학적 인과도 이 정책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패를 자인하지도 정책을 포기하지도 않고 있다. 이쯤 되면 소주성의 정체가 정책인지 아니면 정치적 구호인지 답은 뻔하다.

스무 번도 훌쩍 넘는 연속적 땜질 처방으로 누더기가 된 부동산 정책도 이에 못지않다. 정부는 정의하기도 애매한 ‘투기’의 근절에만 처음부터 올인했다. 그래야 집값·전셋값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수년째 집값·전셋값이 날 새기 무섭게 뛴다. 집 없는 자는 주거난으로, 집 있는 자는 세금폭탄으로 시달린다. 그럼에도 정부는 정책 실패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거듭된 땜질 처방으로 빈부 격차가 날로 극심해진 현실을 빤히 보면서도 말이다. 투기 근절이라는 자신의 지향이 지극히 ‘정의’로운 데다 소위 ‘평등분배’를 원 없이 이룰 수 있도록 실탄(조세수입)까지 안겨주는 부동산 ‘정치’를 정부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가.


요즘 대한민국에는 크고 작은 ‘이것’이 넘쳐난다. 팽창재정(한국판 뉴딜), 탈원전, 임대차 3법, 공공의료 확충(공공의대) 등 명색만 정책이지 속엔 이념으로 빼곡해 전문성도 합의도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는 ‘이것’들 말이다. 실로 믿기 어려운 역사적 퇴행이다.


이제 희망은 오로지 국민이다. 자유·자율, 합리성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국민 모두가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어느 틈에 힘없이 스러진 사회적 이성을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 수백 년 전, 계몽주의는 인류에게 지속적 번영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수년래 흔적만 남게 된 계몽주의적 가치의 내실 있는 복원이야말로 우리 국민 개개인이 몸소 실천해야 할 화급한 시대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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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김민영 기자 my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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