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딸깍발이]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일기장에 담긴 조선의 민낯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조선 시대 역사라고 하면 흔히 '조선왕조실록'을 떠올린다. 왕들의 계보에 따라 "태ㆍ정ㆍ태ㆍ세ㆍ문ㆍ단ㆍ세…"를 외우고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과 대동법이나 탕평책 같은 국가 정책을 암기하는 게 조선 시대 역사 배우기라고 여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조선 시대 전체 인구의 1% 안팎에 불과하던 왕족과 관료, 즉 특권 계층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는 나머지 99% 사람들의 실생활과 매우 동떨어진 이야기뿐이다. 대통령 기록물과 국회의사록, 관보에 나온 정책 내용만 모아놓고 이것이 21세기 사람들의 삶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는 실록 중심의 내용에서 벗어나 조선 시대 평범한 유생들이 남긴 일기 속에서 드러난 민중의 삶에 중점을 둔 책이다. 20개의 서로 다른 유생 일기에서 발췌한 단편적인 수십 개의 에피소드에서 당시 사람들의 삶과 고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목 그대로 실록 중심의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던 일반 사람들의 실제 삶을 엿보고 싶은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할 만한 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고통받는 지금 상황과 비교할 만한 에피소드도 눈에 띈다. 1616년 7월17일 유생 김택룡은 먼 친척뻘인 정희생이 다짜고짜 집으로 찾아와 대성통곡하며 살려달라고 난리 치자 오만 가지 생각에 잠겼다. 정희생의 어머니는 돌림병에 감염된 상태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정희생의 친척들은 물론 동네 주민, 심지어 의원들도 외면했다. 감염 의심 환자가 집에 쳐들어왔으니 당장 자기와 가족의 건강부터 걱정됐을 것이다.
코로나19의 공포에 친지 모임, 대화조차 단절된 현 상황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기본 의료 시스템이 전무하고 정확한 정보도 얻기 어려웠으니 공포심은 훨씬 컸을 것이다. 공포심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아들에게까지 해를 끼칠까 봐 정희생의 어머니가 목을 매 자결한 것. 어머니의 희생으로 사태는 가까스로 수습됐다. 김택룡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정희생의 어머니가 화장당하지 않고 장례 절차에 따라 매장되도록 도와줬다. 전염병 치사율이 매우 높다 보니 이웃사촌이란 말조차 무색하게 모두가 안면몰수할 수밖에 없던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준다.
지금의 수능 시험장보다 치열하던 과거 시험장의 천태만상도 잘 드러나 있다. 유생들이 과거에 앞서 합숙하며 공부하는 이른바 '거접(居接)' 모습 또한 나온다. 유생 수백 명이 기숙학원 형태로 운영되는 지방 서원에 모여 예비고사를 치른다. 이들은 지정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지정 숙소에서 함께 자며 과거 합격의 꿈을 키워나갔다. 군역을 피하려고 공부는 안 하면서 향교에 등록한 유생들의 꼼수도 소개돼 있다.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치르지만 고작 33명만 최종 선발되고 그나마 3년에 한 번 열린 게 과거다. 열기는 지금의 어느 고시보다 치열했던 듯하다. 지역 특별 전형으로 열린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출생지를 바꿔 등록하고 다른 지역에서 몰래 들어온 유생끼리 서로 치고받기도 했다. '동방예의지국'의 선비들이라 부르기에는 부끄러운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자식의 합격을 위해 온갖 술수도 마다하지 않는 부모들의 모습 또한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렇게 힘들여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돼도 관료 생활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경상도 예안 출신 유생 김령은 1612년 35세로 대과에 합격했으나 2년 뒤에야 지금으로 치면 인턴십인 승문원 권지 벼슬을 받았다. 37세로 이미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지만 신참내기 관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免新禮)'를 치렀다. 두 악습은 지금으로 치면 신입에 대한 군기 잡기다. 심한 경우 사람이 죽기도 했다. 지붕 위에 괴상한 자세로 세워놓거나 밤새 돌아가면서 쓸데없이 트집을 잡고 왕따시키고 구타하거나 뇌물을 요구하는 경우 등 온갖 행태가 자행됐다. 직장 내 괴롭힘이 뿌리 깊은 악습임을 보여주는 듯한 대목이다.
이렇게 힘든 조선시대 공무원의 직장 생활에도 공휴일은 있었다. 당시 음력에 맞춰 달의 공전주기인 28일을 4로 나눠 거의 7일마다 한 번씩 쉬었다. 주 6일제 근무로 여름에는 새벽 5시께 출근해 12시간 일했다. 업무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촛불이나 등을 밝힐 기름이 부족해 야근은 생각보다 적었다. 성묘에 7일, 부모 병간호에는 최장 70일, 부모상에는 3년간 특별휴가를 낼 수 있었다. 효도가 강조되던 유교 사회의 특징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조보(朝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현 관보의 전신인 조보는 서울에서 날마다 조간으로, 지방에서는 월간으로 발행됐다. 선조 때인 1577년에는 민간업자들이 독자들에게 구독료를 받고 인쇄했다. 조보는 사실상 오늘날의 신문 형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독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명필가에게 필사본을 맡기거나 내용을 한층 보강하는 등 프리미엄 서비스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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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에 없는 조선사'에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유성룡의 '징비록'과 달리 늘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구국의 마음을 지닌 영웅들의 이야기는 없다. 어떤 대단한 교훈이나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흐름, 일관된 견해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온갖 악전고투 속에서도 살아남고자 피나도록 노력한 조선 시대 미생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에는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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