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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환락가의 대적(大賊)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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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21일, 친일파 윤명선이 서울특별자유시 중구 황금정(을지로)에서 죽었다. 그를 죽인 범인은 홍성우, 김필순, 유정석, 김지양 등이다. 각각 꺽쇠, 떼부, 청수, 땅딸보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불량배 또는 건달이었다. 이들은 중구 명치정(명동) 일대 환락가를 누비며 음식점에서 나오는 손님이나 술에 취한 사람을 협박하고 혹은 싸움을 걸어 금품 빼앗기를 일삼았다고 한다.


윤명선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관료를 지낸 자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에서 중대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한 1006명 가운데 네 명(윤웅렬·윤치호·윤치오·윤치소)을 배출한 가문의 소생. 윤치성, 윤치영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의 장인 김갑순, 윤치오의 장인 김윤정(이상 중추원 참의 출신), 윤치영의 사돈 김성수 등 인척까지 더하면 친일 가문의 규모가 더 크다. 제2공화국 대통령 윤보선도 이 집안 사람이다.

윤명선이 친일파이기는 하지만 범인들 또한 친일파를 처단하겠다고 나선 애국청년은 아니었다. 윤명선이 변을 당한 곳은 황금정 조선취인소 근처. 조선취인소는 증권거래소다. 당시 황금정 2정목(을지로2가)에는 증권사가 많아 '경성의 월스트리트'로 부를 만했다('소설가 구보 씨 중구를 거닐다' 중). 그러니까 '돈 냄새'가 나는 곳이다. 가까운 곳에 명치정과 같은 유흥가가 있으니 건달이 출몰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홍성우, 김필순, 유정석, 김지양 등은 그날 밤 윤명선이 친구 안익조와 함께 조선취인소 부근에 도착하자 시비를 걸었다. 이들은 "술을 먹고 다니는 놈들은 건국의 방해자다"며 먼저 안익조를 구타했다. 그중 하나가 시계를 빼앗아 달아나자 안익조가 뒤따라갔다. 남은 자들이 윤명선을 두들겨 초죽음을 만들었다. 윤명선은 병원에 실려갔지만 피를 많이 흘린 데다 뇌진탕이 겹쳐 오후 11시쯤 숨을 거뒀다.


범인들은 23일 오전 명치정 근처에 있는 유곽과 술집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1946년 2월24일 자 자유신문은 범인들을 '도심의 협위(脅威), 환락가의 대적(大賊)들'이라고 썼다. "이들은 외면은 훌륭한 신사로 보이나 밤이면 본정(충무로1~3가)을 휩쓰는 무서운 갱"이라고도 했다. 자유신문은 '가시지 않는 사회의 악균…보라, 그들은 이렇게 연속출몰'이라는 후속 기사에서 범인들이 잡힌 과정을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홍성우 무리는 22일 밤에도 사냥감을 찾아 명치정에 나갔다. 거기서 한국인 경찰이 미군에게 두들겨 맞는 광경을 봤다. 그 경찰은 윤명선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대적'의 무리는 분노했다. "자기 동포가 미국 군인에게 매 맞는 것을 그냥 둘 수 없다!" 신문은 이들이 '주먹에 철편을 감아 권투식 펀치를 가함으로써 상대를 녹아웃시키는 일종의 무장'을 했다고 적었다.


윤명선의 호상소에서 심부름하던 자가 있었다. 그는 초와 향을 사러 가다가 홍성우 무리와 미군의 시비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사복경찰이 출동해 보니 격투는 시작되지 않았고, 서로 어르는 중이었다. 경찰은 이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불량배의 무리를 미행해 거처를 확인한 다음 이튿날에야 검거했다. 이 지역의 치안을 맡은 본정 경찰서장은 '생명을 내걸고' 범죄를 소탕하겠다고 다짐했다. 윤명선은 경기 양주군 망우리(서울 중랑구 망우리동)에 묻혔다. 그를 죽인 무리의 뒷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그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이제 와서 생각하니 묘연하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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