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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독서] 냉전기 美 엘리트의 일그러진 세계관...'독선과 아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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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독서] 냉전기 美 엘리트의 일그러진 세계관...'독선과 아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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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제목만 보면 역사책 같다. 옮긴이의 말에는 "3000년을 꿰뚤어 오늘을 보게하는 책"이라고 한껏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시작부터 뭔가 이상하다. 3000년 인류사 동안 이어진 바보같은 지도자들의 행태를 보여준다면서 차례도 없이 고대사, 현대사를 오가며 온갖 정치인들을 깔아뭉개면서 시작한다.


역사의 '역(歷)'자도 모르는 사람이 쓴 것이라는 확신은 첫 챕터에 나온 르호보암(Rehoboam)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성경에서 다윗에 의해 세워진 통합 이스라엘 왕국의 분단을 자초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솔로몬에 이어 전제군주정을 강화하려 들자 장군인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10개 지파가 떨어져 나가 북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종래 이스라엘 왕국은 남유다 왕국이 돼 갈라지는 바람에 끝없이 외세로부터 침략당했다는게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천편일률적 해석은 역사가가 할만한 해석이 아니다. 다윗왕조는 애초 세워질 때부터 분단될 위험성을 크게 안고 출발했다. 북부 이스라엘은 유목사회, 남부 유다 지역은 농경사회였다. 유다 출신인 다윗이 두 지역 사회를 무력으로 강제 통합하고 유다와 이스라엘 경계상의 예루살렘에 행정수도를 세운 것이 다윗-솔로몬으로 이어진 통합왕국 역사의 시작이다. 단순히 르호보암의 폭정으로 갈라진게 아니라 출발할 때부터 분열가능성을 안고 간 셈이다.


두번째 챕터 내용 역시 역사와 관계없는 비전문가가 쓴 글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15세기 멕시코 지역에 있던 아스텍 왕국을 마지막 왕 몬테수마가 미신에 빠져 스페인 침략자들을 신으로 여겨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쳤다는 내용이다. 이런 이야기는 소위 '쌍팔년도'에나 할 수 있었던 백인중심주의의 낡아빠진 이론인 데다 아스텍은 애초 왕국이나 제국이 아님은 이미 오래 전 밝혀졌다. 아스텍은 3개 도시국가의 동맹으로 구성된 국가였고 몬테수마는 3개 도시 수장 가운데 한명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아스텍은 몬테수마 때 망한게 아니라 그의 후계자 쿠아우테목 때까지 스페인과 계속 교전했다.


이쯤되면 저자와 출판시기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바바라 터크먼은 1912년생으로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생전 직업은 기자였다. 알고보니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인물이다. 은행가 겸 출판업자이자 미국유대인협회 회장인 아버지와 주 터키 미국대사를 지낸 할머니, 작은 아버지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재무부장관까지 지낸 미국 명문가의 자손이다. 이 책은 그의 말년인 1984년 출간됐으나 우리나라에 지금 번역됐을 뿐이다.

책 내용이 왜 이 모양인지 이제 의문은 거의 풀린다. 이 책은 냉전기, 그것도 미국 최상류층 가정에서 자라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으신 기자분(?)이 쓴 것이다. 백인우월주의와 개신교문화는 기본으로 깔려있을 것이고 1980년대 당시 정계 및 학계의 최대 관심사였던 베트남전 패배 원인, 남베트남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할 것이다. 예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책은 크게 2개의 역사 속 정치세력 비판에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한다. 하나는 르네상스시대 탐욕스러운 교황들, 또 하나는 베트남전과 얽힌 미국 대통령들의 독선이다. 비판은 그중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집중돼있다. 르네상스시대 교황과 케네디라는 2개의 정치세력은 겉으로 보면 시간적, 물리적으로 별 연계성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케네디와 그를 둘러싼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케네디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 당선된 대통령이고 유일한 로마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다.


이로써 미국 사회의 주류인 개신교 세력은 케네디 대통령의 집권기동안 끊임없이 가톨릭을 공격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부각시켜 로마 가톨릭이 과학의 시대를 종교재판으로 막아온 구시대적이고 미개한 식견의 종교라고 몰아세웠다. 갈릴레이가 천문학 자체를 처음 접한 곳이 그 미개하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이를 감안하면 개신교의 시작은 완전히 왜곡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당시 미국 주류 개신교의 시작을 십분 반영했다. 교황과 베트남 전쟁, 케네디 행정부에 대한 내용이 잇따라 이어지게 만든 구조 역시 이를 위해 만든 서사구조인 듯 하다.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찬사만 잔뜩 써놓은 챕터도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에 대한 묘사 부분이 좋은 예다. 저자는 워싱턴에 대해 "자신을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하는 고귀하고 탄탄한 성격과 홍수처럼 밀려오는 난관을 뚫고 나가는 내적인 힘과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라고 긴 찬사를 보낸다.


결국 3000년 역사 속에서 독산과 아집으로 나라를 망하게 만든 지도자들의 일대기에 대해 다룬다면서 정작 저자 자신이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다. 냉전기에 가능했던 이분법적인 선악구분, 백인우월주의, 개신교의 도덕성 잣대 하나로 평가되는 무수히 많은 지도자의 모습은 오히려 순진무구했던 옛 시대의 감성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옛 시대의 감성과 단순한 논리구조, 유려하고 재밌는 문체에 오히려 호소력이 있다. 이 책의 무서운 점은 배경지식이 없어도 읽기 쉽다는 것이다. 자칫 3000년 세계사를 이런 책으로 통괄했다고 착각하면 이 책의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빠져들 수 있다.


되레 책 내용보다 냉전 말기 미국 주류 사회의 사람들이 바라본 왜곡된 세계관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아닐까.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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