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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민간인을 악마로 만든 일본 정부와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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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 교수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이종길의 가을귀]민간인을 악마로 만든 일본 정부와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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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학살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에 수반해 일어난 참극이다. 당시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상태에 빠지자 보수적 감정을 악용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터무니없는 소문까지 퍼뜨리고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도 선포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2017년)’은 이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야마모토 곤노효에(시바타 요시유키) 총리 주재로 진행되는 긴급회의 신이 대표적인 예다. 모든 관료가 미즈노 렌타로(김인우) 내무대신과 야마모토 총리의 대화에 주목한다.

“오는 길에 보니까, 야스쿠니 신사 우에노 공원에 사람들이 떼거지로 모여 있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 “계엄령은 전시나 내란 상황에만 발동하는 거요.” “5년 전 쌀 폭동을 잊었습니까.” “명분 없는 계엄령은 내란을 부를 수도 있소.” “명분이 왜 없습니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어요. 난리통에 여기저기 불도 지르고 다닌다고 합니다.” “누가? 누가 그래?” “누가 그러더군요.”


독립신문 특파원 보고에 따르면 당시 피살된 조선인은 6661명이다. 상당수는 민족 배외주의자 중심의 자경단에 학살당했다. 군대나 경찰도 아닌 민간인이 죽창과 일본도로 난행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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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가쿠인대학 교양교육센터의 정영환 교수가 쓴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는 당시 일본 상황과 재일조선인 역사를 다각도로 들여다본다. 국내 학계가 소홀히 해온 민족사다.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치밀하게 분석한다.

자료에 따르면 1913년 재일조선인 수는 겨우 3635명이었다.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1923년에는 8만415명이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뒤 도일(渡日)하는 조선인 수가 급속히 늘었다. 일본 측 자본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자본가들은 저임금 노동자로 조선인을 주목했다. 물론 처우는 형편없었다. 대다수가 고용주의 부당 대우와 일본인 노동자들의 멸시에 시달렸다. 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본인 노동자들은 저임금 노동에 종사했던 조선인이나 중국인 노동자를 자신들의 직장을 빼앗는 존재로 간주했다. 기업은 불황 속에서 저임금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려 했기 때문에 일본인 노동자들은 이것을 적대시했던 것이다. 1922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석탄 하역 노동자를 일본인에서 중국인으로 바꾸자 일본인 노동자들이 회사에 항의해 중국인 노동자들의 하선을 중지시키려고 난투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 퍼진 이러한 배외적 감정은 이후 관동대학살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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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발전기를 맞았다. 3ㆍ1운동 때처럼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 흑도회(黑濤會), 북성회(北星會) 등 학생과 노동자 층이 어우러져 새로운 활동을 전개했다. 모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결성돼 일본인 사회주의 단체들과 긴밀하게 제휴했다.


일본 치안 당국은 이들의 협력에 단속 태세를 강화했다. 1923년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조선인 단체 50곳과 함께 3ㆍ1운동 기념집회를 계획하자 블랙리스트에 오른 학생들을 야간 급습해 체포했다. 도쿄ㆍ요코하마의 조선인들이 중국 상하이, 미국 하와이에 있는 조선인 단체들과 연락해 무슨 일을 꾸민다는 유언비어도 퍼뜨렸다. 근거 없는 소문으로 조선인에 대한 계엄 태세로 전환한 일본 경찰의 움직임이 관동대학살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ㆍ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 관의 형성이다. 정 교수는 “독립 음모를 꾀하는 가공할 만한 조선인이라는 이미지가 일본 사회에 깊게 침투했다”고 적었다.


“이러한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경찰과 신문이었다. 나카니시 이노스케가 ‘조선인은 하등의 고려가 없는 저널리즘에 희생되어 일본인의 의식 속에 검은 공포의 환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라고 비판했듯이 신문들은 ‘음모를 꾀하는 불령선인단’ 등의 선동적 표제로 일본인의 공포를 선동했다. 경찰의 선제 단속과 그것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신문의 합작에 의해 3ㆍ1운동 뒤 불령선인 관은 급속히 사회 깊숙이 침투해갔다. 관동대학살의 토양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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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관은 영화 박열에서도 볼 수 있다. 박열(이제훈),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등이 어묵 식당에서 대화하는 신이다. 술에 취한 일본인 남성 두 명이 아무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건다. “사회주의 빨갱이 새끼들, 또 작당하고 있구먼." "조선인 쓰레기들은 짓밟아버려야 돼.”


이들의 조선인 차별의식을 살생까지 이끈 건 일본 정부였다. 추밀원(일본 천황의 자문기관)의 비준조차 거치지 않고 내란 사실도 없는데 계엄령을 공포했다. 근위 사단 등을 출병하고 각 신문에 폭동 보도를 부추겨 사람들에게 유언비어를 사실로 오인하게 만드는 근거를 제공했다.


혼란을 수습한 뒤는 어땠을까. 일본 정부는 잘못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인 가운데 불령선인과 착한 선인이 있는데 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법으로 학살 책임을 자경단에 전가했다. ‘선인 문제에 관한 사항’에 기재된 선전 방침이 대표적인 예다. 불령한 선인에 의한 약탈ㆍ강간ㆍ방화가 존재한 것을 선전하면서 학살의 주체로 시민을 가리킨다.


잘못된 사후 처리는 일본인의 기억 속에 유언비어를 사실로 기억하게 만드는 부정적 유산을 낳았다. 예를 들면 이듬해 요코하마에서는 지진 1주년을 기해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복수할 거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에 자경단은 오랫동안 경계 태세를 취해야 했다.


정 교수는 “‘학살의 기억’은 살해당한 당사자인 조선인뿐만 아니라 살해한 일본인의 의식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고 요약했다. “일본인 사이에 있는 불령선인 관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진 당시와 다름없이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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