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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비읍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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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한글을 깨친 아들의 학습지 숙제를 봐주다가 슬픈 기억이 떠올랐다. 비읍. 그렇다. 모든것은 비읍 때문이다.


부모님과 주변 친척들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미취학 아동 시절의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것을 좋아하는 발랄한 어린이였다. 그래서인지 사진첩에는 여러 사람 앞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사진이 유난히 많다.

그러한 나의 성향이 바뀐 것은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중년의 나이를 넘긴 담임 선생님은 수업 도중 '비읍'을 써볼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아마도 첫 수업이 아니었나 싶다. 콩나물 줄기같은 손이 곳곳에서 번쩍 올라왔고, 유치원에서 글을 배우고 온 본인도 당당하게 주먹을 들어올렸다. 자신감의 기운을 읽은 것인지 나댐이 유난했던건지 선생님은 나를 가리키며 칠판에 비읍을 써보라 하셨다. 그리고 비극이 시작됐다.


리듬체조 선수의 걸음걸이로 칠판을 향했다. 분필을 잡아 들고는 물컵모양을 부드럽게 그린 뒤 가운데 작대기를 주욱. 학교생활을 잘 해내고 싶었던 의지의 1학년은 비읍을 막힘없이 써냈지만, 굳은 표정의 담임 선생님은 "틀렸어! 다시"를 외쳤다. 눈 앞이 깜깜해졌으나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같은 방법으로 비읍을 써보는 수밖에. "틀렸어! 다시" "아니야! 다시!" 영화 위플래시의 플렛처 교수 마냥 무시무시한 채찍질이 이어졌다. 물컵, 작대기, 물컵, 작대기를 반복하던 나는 결국 울상이 된 채로 자리에 다시 앉았고 그 이후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신하는 것은 그 뒤로 나는 발표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아들은 자음과 모음을 제 멋대로 쓴다. 그럴 때마다 비읍은 일(1)자 두개를 나란히 먼저 쓴 뒤 가운데와 아래에 작대기(ㅡ) 두개를 쓰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얘기해준다. 미음은 일(1)자를 먼저 쓴 뒤 기억(ㄱ)자 모양, 아래 작대기(ㅡ) 순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써보는 아들을 응원한다. 나와 같은 절망은 겪지 않기를 바라면서.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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