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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8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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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 장면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아래, 사람이 장사진(長蛇陣)입니다. SF영화의 지구 탈출 장면일까요? 외계로 오가는 버스정류장의 모습일까요? 피란민들이, 끊어진 철교를 기어서 건너는 슬픈 사진도 떠오르게 하는 이게 무엇일까요? 에베레스트 사진입니다.


외국 통신사가 보낸 뉴스 사진입니다. 하도 놀라워서, 건성으로 넘기던 신문을 눈에 바짝 붙였습니다. 사진설명까지 꼼꼼히 읽었습니다. "에베레스트 정상… 기다리다가 3명 사망. 320명 정도가 몰려 있었다…." 잔상이 생각보다 오래 가겠습니다. 쉽게 잊히지 않겠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이 '세상의 어머니(초모랑마)', 네팔 인들이 '하늘의 이마(사가르마타)'라 부르는 에베레스트. 비행기도 예의를 갖추고 날아가는 8848m. 그 외경의 꼭짓점에 이르는 길이,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형국이라니! 하늘에서 보면 얼마나 불경스러울까요.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어떤 이의 육성도 들립니다. "여기는 정상, 더 오를 데가 없다." 1977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봉에 섰던 사나이 '고상돈'입니다. 메아리도 들립니다. 줄을 서서 오른 사람의 환호와는 견줄 수 없이 청량한 울림입니다. '인정과 과시 욕구'가 뿜어낸 음파(音波)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소리입니다.


산신령도 흐뭇하게 들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희망과 성취의 경계는 물론 하늘에 대한 공경의 미덕까지 품은 말이니까요. 옛시조 "태산이 높다하되…"보다 훨씬 더 명징한 가르침입니다. 온몸으로 대지에 써낸 문장이니까요. 그 여운은 아직도 히말라야 바람결에 실려 있을 것입니다.

"여기는 정상." 벅찬 보람과 가눌 길 없는 격정의 슬로건입니다. "더 오를 데가 없다." 외롭게, 눈물겹게 묵묵히 하늘계단을 걸어 올라갔을 청춘의 시입니다. 마침, 지난 토요일(1일)이 그의 40주기였지요. 육체의 동력과 마음의 스폰서가 믿을 것의 전부였던 산악인들의 세월이 새삼 그립습니다.


시인 '김장호'도 보입니다. 에베레스트 원정계획에 가담하여 10년쯤을 고상돈 등과 함께 뒹군 '산꾼'입니다. 산악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그의 책 제목('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처럼, 인생의 반은 산에서 보낸 사람이지요. 에베레스트 풍경이 자꾸 눈에 밟혀서 그의 책을 뒤져봅니다. 한 대목이 도드라져 읽힙니다.


"나는 한때 산의 높이에만 매달려 있었다. (…) 높이로만 솟구치는 일, 극지로 향하여 한사코 기어오르기만 하는 일에서, 내 둘레 내 강산의 넓이로 시야를 돌려대게 되었다. 경쟁이나 기록수립 여부에서만 등산의 동기를 찾게 되면, 산을 오르는 즐거움은 거꾸로 줄어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백명산기' 후기)


다시 에베레스트 사진을 봅니다. '이렇게 줄을 서는 수백 명의 마음도, 높이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추측이 전문산악인들의 세계에 대한 제 무지를 드러내는 비약이라면 좋겠습니다. 주제넘은 억측이라고, 누가 꾸짖어주면 더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8848m를 딛고 싶은 욕망이, 누구보다 먼저 달나라 여행을 가고 싶은 욕심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을 관광수입 증대의 차원으로 반기며, 폐해와 폐단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유감스럽게도, 이런 물음들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급기야, 네팔 정부가 대책을 내놓았다지요.


'등반허가증을 남발하지 않겠다, 아무나(?) 오를 수 없게 않겠다.' 이제라도, 다행입니다. 에베레스트는 고상돈과 그의 진정한 동지들이나 오를 수 있는 산. 8848은 물리적 높이가 아니라, 인류가 우러르는 순결한 정신의 고도.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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