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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28]보지라르 가(街)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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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저는 낯선 전화를 받습니다. 이성자기념사업회. 프랑스에서 활동한 이성자(1918~2009) 화백을 기리는 단체의 대표입니다. 각종 유품을 수집중이라면서 미당 서정주 시인과 편지 교류가 여러 번 있는 듯한데, 혹시 보관된 편지 중에 이성자의 서신이 있는지 확인해 달랍니다. 제가 서정주의 유품을 정리한 사람이어서 아마도 이 일에 적임자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미당이 소장하고 있는 편지들은 그의 모교인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또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어서 반나절이면 찾을 수 있지요. 4000통 편지 중에서 네 점을 찾아서 이성자기념사업회 측에 건네줍니다.

부끄럽게도, 이성자 화백을 그때 처음 알게 됩니다. 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서울 강남의 신사동 사무실을 방문하니, 사무실 공간 대부분이 전시관입니다. 건물주이자 사업을 하는 아드님이 임대 대신에 모친 작품을 전시하는 문화사업을 하는 겁니다. 이성자의 작품 100여 점을 비롯해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의 수준과 개성이 놀랍습니다. 파란만장한 일생과, 그 바탕 위에서 솟아난 창의적 개성에 위엄을 느낍니다. 위엄. 참 오랜만에 만나보는 예술가의 모습입니다.
미술계에선 익히 알려진 존재지만 일반인들에겐 아직도 낯선 예술가. 국내 미술계에 이렇다 할 인연도 없이 프랑스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한 자유영혼. 한국적 정서와 우주적 상상력을 함께 보여주는 미의 여신 앞에서 거장의 강렬한 아우라(Aura)를 느낍니다. 1980년대 중반에, 그녀는 미당과 서신 교환을 하고 만나기도 합니다. 미당은 당시 세계적 수준에 오른 한국 예술가들의 상호교류를 기획했는데, 이성자 화백과는 이 무렵에 교류가 이루어지는 거죠. 도쿄 전시회 때 그녀를 위해 쓴 축시가 있다는 점도 저는 처음 알게 됩니다. 이성자기념사업회 쪽에서도 제게 상응하는 선물을 주었던 거죠.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거장들의 교유(交遊)가 있었던 겁니다.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보지라르 가 98번지 6층 건물. 지붕 바로 아래 한 평 남짓 작은 방.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결혼생활 파경의 쓰린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남편과 아들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이역만리 프랑스에 안착한 그녀가 세 들어 살던 집이죠. 오늘 저는 이 거리에 서서 이성자의 다락방 화가 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1951년 프랑스 파리로 무작정 떠나 와, 의상디자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순수미술에 더 재능이 있다는 교수의 권유에 따라 화가로 다시 태어나는 그녀. 1955년엔 스승의 화실에서 떠나와 이곳 보지라르 가 98번지 6층 다락방으로 이사합니다. 하녀가 살던 방이었죠.

"내가 문학소녀라서 그런 데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라고 회고하는 그녀. 가난을 탓하지 않습니다. 캔버스 살 돈이 없습니다. 헌 침대 시트를 사서 성한 부분을 잘라 아교 칠을 해서 손수 만들어 씁니다. 프랑스 화단 데뷔작 <보지라르 가에 내리는 눈>(1956)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나는 거죠. 외로운 여인은 6층 다락방에서 바라보는 집 앞 풍경을 자신의 느낌대로 표현합니다. 화면의 윗부분은 작은 집과 길 건너 고층건물들인데 어두운 톤의 단순한 면으로 처리합니다. 아랫부분은 눈 내린 마당. 흰색의 텅 빈 공간으로 남겨 둡니다. 위는 무겁고 아래는 가벼워 긴장감이 저절로 생기네요.
단순한 구도인데 느낌이 풍부하고 강합니다. 윗부분 어두운 톤은 화가의 과거 같고, 아래쪽의 밝은 여백은 화가의 미래 같습니다. 마당 왼쪽 귀퉁이에 겨울나무 두 그루가 화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릅니다. 서로를 향해 살짝 휘어졌는데 절제된 애절함이 있습니다. 이역만리 문화의 변방에서 날아온 화가 자신의 모습이 아니겠는지요. 그러나 다시 보면 안간힘을 쓰며 마른 팔로 서로를 붙들려는, 모든 이들의 현재진행형 사랑으로 읽힙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사랑은 서로를 붙들려는 안간힘입니다.

저는 미술의 여신에게 장차 드러날 위엄의 싹을 이 작품에서 미리 봅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시에 그린 작품과 겹쳐 읽히는 거죠. <세한도(歲寒圖)>. 추위가 와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의 한결같음을 그린 작품. 세상인심 다 변해도 제자 이언적만큼은 스승 대하는 마음이 한결같음을 여기 비유해서 그린 작품이죠.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진가를 아는 것처럼, 사랑의 상처와 고통 뒤에야 예술이 성숙된다는 것. 두 작품에 함께 있는 예술가의 절대고독과 위엄의 패턴입니다.

회화는 색과 형태의 단순한 배치가 아닙니다. 대상의 사실적인 모방도 아니죠. 예술가의 내면 고독이 투영되어야 합니다. <보지라르 가에 내리는 눈> 속에는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킨 한 여인의 투혼이 지금도 활활 살아 있지요. '절제된 위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녀 온 지 100년 된 세상. 보지라르 가의 햇살 기우는 오후. '괜찬타, 괜찬타'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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