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능력 부인하는 전략
檢 "화이트칼라 범죄에서 보기 드문 주장"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석하던 중 기자의 질문을 손으로 뿌리치고 있다. /문호남 기자 munonam@
단독[아시아경제 박나영 기자, 이기민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서 '이규진 업무 수첩'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원장을 상징하는 '大'자를 추후 기입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23일 아시아경제가 검찰 등 취재를 종합한 결과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양 전 대법원장 측은 혐의를 전면 부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사항이 빼곡히 적혀 있어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이 될 것으로 알려졌던 이규진 업무 수첩에 대해서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검찰 관계자는 "화이트칼라 범죄에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이규진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으로 지내면서 각종 재판 거래와 법관 사찰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양 전 대법원장 등 윗선의 지시와 보고사항을 3권의 수첩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검찰은 이 수첩에서 '大'자로 표시된 부분이 양 전 대법원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주요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 측은 '이 부장판사가 이 사건이 불거진 후 '大'를 적어넣었을 수 있지 않냐'는 취지의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부인한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앞서 검찰조사에서와 같이 일부 부인할 수 없는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편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강제징용 소송과 관련해 전범 기업의 소송을 대리했던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한상호 변호사를 만난 것과 관련해서는 '만난 사실은 있지만 일제 징용소송과 관련한 논의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서는 인사권한 범위에 포함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규진 업무수첩'과 '김앤장의 양승태 독대 문건' 등은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주요 물증으로 꼽혀왔다.
앞서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직무유기·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공무상 비밀누설·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민사소송과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 등의 재판에 개입하고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준 혐의를 받는다. 그는 헌법재판소 내부기밀을 빼내 헌재와의 위상 경쟁에 활용하고 공보관실 운영비로 비자금 3억5000만원을 조성한 혐의도 받는다.
박나영 기자 bohena@asiae.co.kr
이기민 기자 victor.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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