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의 초상화 모습. 그는 젊은시절 코르시카 독립투쟁에 뛰어들었다가 프랑스에 의해 독립군이 궤멸하면서 친 프랑스 인사로 전향했다. 그는 코르시카 총독부와의 친분을 통해 나폴레옹을 파리로 유학보내게 된다.(사진= 프랑스 말메종 국립 박물관 홈페이지/http://musees-nationaux-malmaison.fr)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의 초상화 모습. 그는 젊은시절 코르시카 독립투쟁에 뛰어들었다가 프랑스에 의해 독립군이 궤멸하면서 친 프랑스 인사로 전향했다. 그는 코르시카 총독부와의 친분을 통해 나폴레옹을 파리로 유학보내게 된다.(사진= 프랑스 말메종 국립 박물관 홈페이지/http://musees-nationaux-malmaison.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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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카탈루냐에 이어 코르시카가 유럽 분리주의 운동의 새로운 본거지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 코르시카의 독립투쟁은 18세기부터 약 300년에 걸쳐 줄기차게 일어났다. 코르시카가 처음 독립투쟁을 벌이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긴 나폴레옹의 가문인 '보나파르트' 가문의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 사실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독립투사 출신이었다.


원래 나폴레옹의 집안인 부오나파르테 가문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집안으로 보나파르테란 이름은 이후 프랑스로 전향하면서 발음이 프랑스식으로 바뀐 것이다.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1755년, 코르시카 섬의 독립운동가였던 '파스콸레 파올리(Pasquale Paoli)'와 함께 당시 코르시카를 지배하던 제노바에 항거한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카를로는 파올리의 부관 중 한사람으로 독립전쟁에 뛰어들었고,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이후 코르시카 독립투쟁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고, 코르시카 공화국이 선포됐으며 만 25세 이상 모든 섬의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고 3년마다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국가원수인 통령을 뽑는 근대식 민주주의 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절대왕정에 신물을 느꼈던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코르시카의 민주주의 독립투쟁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보냈고, 이미 18세기 이후 지중해 무역의 쇠퇴와 함께 세력이 약해진 제노바 정부도 적극적인 군사 진압에 나서지 못하면서 코르시카 공화국이 제대로 세워지는 듯 보였다.


18세기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이자 코르시카 공화국의 통령이었던 파스콸레 파올리(Pasquale Paoli)의 초상화 모습(사진=위키피디아)

18세기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이자 코르시카 공화국의 통령이었던 파스콸레 파올리(Pasquale Paoli)의 초상화 모습(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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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768년, 제노바가 섬 전체를 프랑스에 매각해버리면서 코르시카 공화국의 꿈은 좌절된다. 섬을 양도받은 프랑스가 10만 대군을 동원해 코르시카 침공에 나서자 코르시카 독립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참패해 붕괴했으며 통령인 파올리는 몇몇 측근들과 프랑스의 숙적인 영국으로 망명했다. 파올리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구성했고 이후에도 독립 투쟁을 이어나가게 된다.

한편,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코르시카 독립군이 참패하고 파올리가 망명하자 결국 프랑스 측에 항복했다. 프랑스는 코르시카 공화국 잔당들에 대해 유화책을 폈고, 카를로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총독부에 협력해 대표적인 친 프랑스 인사로 변모하고 만다. 프랑스 측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카를로는 이름까지 프랑스식인 '샤를 보나파르테'로 바꿔버렸다. 그는 코르시카 총독과의 연줄을 통해 아들들을 파리의 군사학교로 유학을 보내게됐으며 이 덕분에 19세기 군사천재라 불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전향에 따라 코르시카 내에서 보나파르테 가문에 대한 명성은 상당히 깎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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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파올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자 영국과 프랑스 왕당파의 이해득실에 따라 다시 코르시카로 돌아오게 된다. 파올리는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코르시카로 돌아온 이후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영국령 자치주인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을 만들자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이에따라 원래 그를 따르던 코르시카 인사들과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들간에 알력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혁명 직후 고향인 코르시카로 돌아와있던 나폴레옹은 친 프랑스 인사라고 파올리로부터 탄압을 받게 됐다. 결국 파올리의 탄압을 피해 보나파르트 가문은 프랑스로 완전히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파올리가 주창하던 영국령 자치주 독립은 코르시카인들의 대대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했고,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구국 영웅이자 황제가 되면서 파올리는 코르시카에서 철수하는 영국군을 따라 다시 영국에 망명하게 된다. 코르시카의 독립열기는 이미 지역의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고, 프랑스화도 나폴레옹 집권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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