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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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게가 아직 같은 자리에 있을까?" "여전히 그 아줌마가 장사를 하는 걸까?" "그 집 아들도 이제 어른일 텐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이 등을 떠밀어, 제부도에 왔습니다. 잊었던 상호(商號) 하나가 불쑥 떠오른 까닭입니다. '재춘이네 조개구이'. 날이 추워지면서 조개구이가 먹고 싶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아침 일찍, 고양이세수만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 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다. 이십여 년이 흘렀는데, 거기라고 어찌 변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그때 모습이 아니고, 사는 곳이 그때 그 집이 아닌데.' 아니면 어떠랴. 바지락 칼국수나 한 그릇 먹고 오자." 그럴 요량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짐작대로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새 길이 뚫리고, 묵은 길들도 한결 번듯해졌습니다. 길이 나아지는 것이야, 내남없이 반가운 일이지요. 그러나 모두에게 환영받는 변화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개발'이란 것이 대개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만족스러운 표정인데, 저 사람은 못마땅한 얼굴입니다.


 주민과 길손의 시선이야말로 상반된 것이기 쉽지요. 여행객들은 가는 곳마다 고즈넉하고 평화롭기만을 기대합니다. 바람도 점잖고, 햇살도 얌전하기만 바랍니다. 추억의 장소라면, 시간이 멈춰져 있어야 합니다. 지붕도 울타리도 손보지 않았어야 합니다. 국밥집 허리 굽은 할머니는 여전히 아궁이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69]제부도에서 원본보기 아이콘
 참으로 이기적인 주문이지요. 여행객의 욕구가 충족되려면, 모든 시골마을은 민속촌이나 생활사 박물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구불변의 재료들로 시간의 오픈세트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은 마네킹으로 바꿔놓아야겠지요. 날씨쯤은 저절로 맞춰져야하고, 주민들의 노동은 쉼 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제 욕심도 그렇게 터무니없습니다. 누가 불러서 오기라도 한 것처럼, 낯선 풍경을 탓하고 있습니다. 재춘이네가 보이지 않는 까닭입니다. '재춘이 엄마'라는 시의 모티프가 된 그 집이 없어졌습니다. 주차장 앞 그 터는 분명한데, 갑수네도 없고 병섭이네도 없습니다. 상규네도, 병호네도 없습니다.


 대신 커다란 가건물 하나가 덩그마니 섰습니다. 간판에 예외 없이 애들 이름이 적힌, 점포 예닐곱 군데가 줄지어 섰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터를 지붕 하나가 고스란히 이고 있습니다. 들어가서, 칼국수를 시키며 물었습니다. 여기가 예전에는 이러저러한 곳이었는데, 맞느냐 물었습니다.


 '맞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고만고만한 업소들이 힘을 합쳐서, 이런 식당을 만들게 되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 가게 숫자만큼의 아낙네들이 국수를 삶고, 음식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그중에 나이가 제일 들어 보이는 이에게 물었지요. "혹시 재춘이 엄마를 아십니까?"


 고개를 가로젓더군요. 순간, 제 상상은 꼬리를 물었습니다. "재춘이네는 일찍이 제부도를 뜬 모양이다. 그렇다면 돈도 어지간히 벌었다는 뜻일 게다. 아니면, 변화의 파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재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 장사를 접었거나 대처로 갔을 것이다."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재춘
 이 엄마뿐이 아니다/보아라, 저/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후략)
 - 졸시(拙詩), '재춘이 엄마' 에서
 
 아무려나, 재춘이 엄마는 제게 퍽 소중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으로 시를 써서 얻은 것이 분에 넘치는 까닭입니다. 여러 시인들이 귀한 지면에 올려주고, 낭송해주었습니다. 많은 네티즌들이 이 작품을 인터넷 공간에 심고 퍼뜨려주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땅 모든 어머니들의 뜨거운 '모성(母性)'에 대한 공감과 찬사지요.


 어느 기업광고에도 쓰였습니다. 어머니를 기리는 시가 자본주의의 시, 카피와 만났습니다. 이런 문장으로 끝나는 광고입니다. '자식의 이름으로 사는 게, 그게 엄마의 행복인 거다'. 재춘이네를 닮은 여러 상호들이 함께 따라붙어서, 세상에 재춘이 엄마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었지요. 선희네 수선, 연수네 약국… 봉숙이네 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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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뒤편으로 돌아 나오다가, 공공미술 프로젝트 하나를 보았습니다. '바람결'이란 설치작업이었습니다. 탁 트인 바다를 향해 건물을 앉히고, 촘촘한 그물로 감싸고 수만 개의 수술을 붙여서 바람에 맡겨놓은 작품입니다. '갤러리'를 겸한 그곳에, 지난 시절 제부도 사람들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제부도 초등학교와 관련된 장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제 눈에는 재춘이 같은 아이들과 엄마들만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하나같이 검게 그을린 얼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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