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가곡에서 피아노는 단순히 성악가를 위한 반주에 그치지 않는다. 피아니스트는 독일 성악의 전통 속에서 가곡에 내재된 피아니즘을 찾아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무대에 오른다. 베이스 연광철의 전아한 음색은 김선욱의 건반에 실려 관객들의 내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제공=빈체로]

독일 가곡에서 피아노는 단순히 성악가를 위한 반주에 그치지 않는다. 피아니스트는 독일 성악의 전통 속에서 가곡에 내재된 피아니즘을 찾아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무대에 오른다. 베이스 연광철의 전아한 음색은 김선욱의 건반에 실려 관객들의 내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제공=빈체로]

AD
원본보기 아이콘

2009년 12월 21일. 예술의전당에서 연광철-정명훈의 슈베르트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공연이 끝나자 김선욱은 "와인을 하자"고 했다. 그날 밤의 기억이 특별한 건 김선욱이 언젠가 가곡 반주에 나서리라는 느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8년이 지나, 그날 밤 김선욱의 눈빛을 다시 봤다. 지난 28일 베이스 연광철의 '독일 예술가곡의 밤'이 예술의전당에서 열렸고, 김선욱은 반주자로 무대에 섰다. 전반부 마지막 곡 슈베르트 '뮤즈의 아들'이 끝나고, 무대 중앙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연광철을 향해 김선욱은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가수를 앞으로 보내고 고개를 숙이는 김선욱의 모습을 처음 봤고, 표정엔 신뢰와 발견의 기쁨이 섞여 있었다. 연광철에 대한 존경, 슈베르트와 독일가곡을 동경하고 고전의 깊이를 되새기는 희열이 담담한 미소와 함께 했다.


 한국 클래식 공연 시장에서 리트(독일 예술가곡) 공연은 제작과 흥행이 쉽지 않다.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1925-2012)ㆍ헤르만 프라이(1929-1998), 테너 페터 슈라이어(1935년생),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1967년생)가 아시아를 방문하는 일정에 한국도 들러서 "독일인이 슈베르트 3대 가곡집을 부른다"고 홍보해도 서울 소재 유명 콘서트홀 좌석을 3분의2 이상 채우긴 어려웠다.

 2009년 연광철-정명훈 공연처럼 관객이 1500석 이상 들어차도 문제다. 가수들은 기침이나 지루해하는 객석의 작은 움직임에도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태생적으로 리트는 살롱에서 즐기거나 500석 규모의 실내악 전용홀에서 감상할 때 최적을 이룬다.


 연광철 독창회는 여러 난관을 뚫고 올라간 공연이다. 예술의전당 좌석 2400석 중에 가수 소리를 정면으로 못 듣는 합창석과 거리가 먼 3층 문을 닫았고, 1ㆍ2층 1500석 중 절반 가량이 유료 관객이었다. 연광철이 고른 슈베르트-브람스-볼프의 곡목도 리트의 유명작들과는 대중성에서 차이가 났다.


 뉴욕타임스가 '작은 거인'으로 평가한 연광철은 보통 해외 오페라하우스에선 공연장을 울리는 바그너 전문 베이스로 세계적 명성을 구가한다. 바이로이트 축제를 비롯해 뉴욕 메트,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빈 슈타츠오퍼에서 12월에 내한하는 르네 파페와 함께 최정상권 베이스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연광철이 고른 곡목들은 주로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을 비추는 세트리스트였고, 작곡가들이 당대 문학가들의 시작(詩作)에서 어떻게 영감을 받았는가를 관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슈베르트 '저승으로의 여정' '타르타루스의 무리' '하프에게'로 시작된 연광철의 보이스톤은 2010년대 초반 호암아트홀 독창회와 사뭇 달랐다. 베이스 음성으로는 다소 부드럽고 가벼운 성질을 지녔던 과거에 비해, 쉰 둘의 연광철은 투명함은 다소 탁해진 대신 소리의 권위는 배가됐다.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미성이라기보다 본인 주관에 따라 메사디 보체(음을 길게 뻗으면서 서서히 크레센도하다가 이어서 데크레센도하여 끝나는 기교)와 프레이징을 제어하는 연륜이 흠뻑 묻어났다. '프로메테우스' '마부 크로노스'로 이어지면서 목이 공연장의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트레이드마크인 명료한 독일어 딕션도 알알이 객석에 꽂혔다.


 베이스는 저역을 내기보다 말끔한 고음을 처리하기 쉽지 않다. '봄날'에서 연광철의 고음은 포르테에서 숨이 가지런히 유지됐지만 그의 40대와는 분명히 다른 탄력감이었다. '야상곡' '뮤즈의 아들'에서 경과부분을 처리하는 안정적인 소토보체(Sotto Voce:낮은 소리로)가 2017년 연광철의 아이덴티티다.


 김선욱의 피아노는 협주와 반주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추구했다. 해석의 개성과 터치의 뉘앙스가 안드라스 쉬프가 페터 슈라이어와 함께 할 때의 자세와 상통한다. 베이스가 전하는 원숙한 해석 사이에 슈베르트가 기울인 피아노의 아름다움이 김선욱의 개입으로 군데군데 피어났다. 리트에서 반주자는 들러리가 아니라 가곡에 내재된 피아니즘을 찾아내는 임무 역시 중하다.


 연광철과 김선욱의 고전적 품격은 후반부 브람스와 볼프로 그대로 이어졌다. 연가곡집이 아니더라도 곡이 꼬리를 물면서 다음 곡의 드라마를 안내하는 형태였고 무르익은 리트 가수의 절정이 무엇인지 증명했다. 과거 슈만의 '시인의 사랑'에서 연광철은 "나는 알아, 내 사랑아. 네가 얼마나 비참한지를"를 내뱉으면서 객석에 거대한 정적을 함께 선사했다.


 이날 공연에선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 대신, 독일 시인들의 시가가 작곡가를 거쳐 가수와 피아노를 통해 관객에 이어지는 즐거운 지적 유희가 맴돌았다. 환호성 대신 수줍게 서로를 대하는 '리더 아벤트'였다.


 연광철은 앙코르 무대를 사실상 3부로 꾸몄다. 서방 오페라 하우스를 뜨겁게 달구는 바그너 악극의 솔로를 세 곡이나 불렀고 '기다리는 마음' '신고산 타령'으로 멋과 흥을 더했다. 수없이 들어온 한국 가곡이지만 기교를 자제하고 가사 전달에 애쓰는 겸손함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공연후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연광철-김선욱을 찾아 격려했다.


한정호 객원기자

한정호 객원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