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소동/안희연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을 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 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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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시에 꼭 쓰고 싶은 장면이 하나 있다. 십수 년 전 어느 한여름의 일인데, 그때 내가 살던 아파트 건너편엔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당연히 여름방학 동안이었고 게다가 이글이글 불타는 한낮이었으니 학교 운동장엔 말 그대로 개미 한 마리 없었다. 그런데 어떤 아이 하나가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폭죽을 팡팡 쏘아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 나만 그 장면을 보았던 건 아니었나 보다. 학교 바로 옆 파출소에서 나온 경찰관 둘이 아이를 향해 걸어갔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경찰관들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경찰관들과 함께 터벅터벅 교문을 걸어 나왔다. 별일 아니라면 아니겠지만 나는 괜히 그때 그 장면에 가끔 붙들리곤 한다. 이 시를 읽고 나는 하릴없이 시소를 보러 한밤에 놀이터에 갔더랬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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