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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아름답게 늙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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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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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많다고 젊은이보다 더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어쩌면 그보다 못할 수도 있다.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서 날카롭게 지적했을 때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90살을 넘긴 지센린 선생은 <다 지나간다>에서 좀 더 과격한 표현을 썼다.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별로 해 줄 얘기가 없는 것은 대부분 인생을 헛살았기 때문이다."

낙엽 지는 가을, 늙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새로 돋아나는 연두빛 새 잎도 아름답지만 울긋불긋한 단풍과 땅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도 나름대로 아름답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늙음도 단풍처럼 아름다움의 하나가 돼야 하지 않을까. 50 중반을 넘기면서 후배에게 뭔가 가르치기보다 '너나 잘 하세요'라며 스스로 타이르는 게 낫지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늙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했는데, 이는 좀 더 온유하고 너그러워져야 아름답게 늙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주변을 보면, 참 곱게 늙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늙으면 곤란하다"는 반면교사가 너무 많다. 촛불 1년, 청산해야 할 부패와 악습이 아직도 산더미인데, 그 책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득권을 움켜 쥔 늙은이들이다.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주인이 돼 만들어 가야 할 미래를 막무가내로 깔아뭉개는 이들, X 싸 놓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늙은이들, 그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을 음악으로 알려준 분이 있다, 보헤미아 출신의 미국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1903~1991)은 88살에 돌아가셨으니 꽤 오래 사셨다. 이 가을, 제르킨이 84살 때 연주한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인 32번 C단조, 그 마지막 악장을 들어보면 어떨까. 늙어서 앙상해진 손, 거기서 이토록 맑고 투명한 소리가 울려 나오다니, 놀랍지 않은가. 기력은 젊은이에 비해 떨어지지만, 마음만은 삿됨이 없는 순수 그 자체다. 오직 음악을 위해 평생 기량을 갈고 닦은 구도자의 모습이자 신선의 경지다. 베토벤에 대한 외경심이 오롯이 담긴 감동적인 연주, 우리에게 "착하게 늙어라, 지혜롭게 늙어라, 아름답게 늙어라" 얘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듣기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C단조 2악장  '아리에타와 변주곡', 피아노 루돌프 제르킨<1987 연주>)

▶듣기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C단조 2악장 '아리에타와 변주곡', 피아노 루돌프 제르킨<1987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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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이 곡을 1822년 1월에 완성했으니, 52살 때였다. 마지막 소나타답게 인생을 달관한 듯, 모든 고뇌를 초월한 단순한 아름다움을 들려준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와 마지막 현악사중주곡들에서 볼 수 있는 폭풍 뒤 안식이다. 이 곡은 여느 소나타들과 달리 두 개의 악장으로 돼 있다. 2악장 '아리에타와 변주곡'은 베토벤이 작곡한 32개의 소나타 중 마지막 악장인 셈이다. 제자 안톤 신틀러가 "왜 3악장을 쓰지 않았냐"고 묻자 베토벤은 "시간이 부족해서 못 썼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말은 농담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변주에서 베토벤의 정신이 요동쳐 하늘 높이 치솟을 때, 더 이상 새 악장을 덧붙일 필요가 없음을 실감케 된다.

제르킨은 "내가 피아니스트긴 하지만, 피아노는 음악 자체에 비하면 내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연주라는 '기능'보다 음악에 담긴 위대한 천재의 영혼과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곡의 클라이맥스, 최고조에 이른 감정은 밖으로 폭발하는 대신 내면에서 스스로 정화된다. 유례없이 아름다운 대목이다. 진정 지혜롭게 늙은 자만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 위대한 작곡가에 대한 경의를 담아 헌신적인 열정으로 연주하는 84살 노대가 제르킨의 모습이 아름답다.

오늘(11월2일),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는 고영주 이사장에 대한 해임안을 논의한다. 고영주는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으로 명예훼손 민사에서 벌금 3000만원을 선고받고 형사 판결을 기다리는 인물이다. 영화 <변호인>에 묘사된 '부림사건'의 수사를 지휘하며 인권유린을 밥 먹듯 일삼아 온 공안검사 출신인 그는 한때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MBC를 추락시키고 망가뜨린 주범으로 꼽힌다. 방문진 이사장이라는 공적 책임을 망각한 채 경영진과 공모해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조 가입과 정당한 노조 활동에 대한 보복을 일삼았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기자와 PD를 모두 비정상 또는 좌파로 매도하며 배제하는 데 앞장섰다. 오죽하면 국정감사에서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지적과 함께, '방송추행범'이란 지적을 받았을까.

상식과 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물러나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고영주 이사장은 자신에 대한 해임안이 가결돼도 여전히 이사로 남아 투쟁을 계속하겠단다. 1949년생이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정신이상자라 하더라도 집에서 혼자 늙어간다면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광기를 무기로 공영방송 MBC를 망가뜨렸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헌법 시스템을 앞장서서 유린하는 것을 계속 지켜봐야만 할까.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클래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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