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도둑맞은 책'

시나리오 작가와 제자의 납치 스릴러극
타인과의 비교·경쟁·좌절·번민의 연속
끊임없는 사건사고들에 질문을 던지다


연극 '도둑맞은 책'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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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휘황찬란한 조명이 쏟아진 영화대상 시상식 날.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이 돌연 사라진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 영화를 쓴 그는 이날 누구보다 화려하게 주목받았다. 그가 깨어난 곳은 어두컴컴한 지하 공간. 무대는 동윤의 실종과 그가 감춰둔 진실을 책장을 넘기듯 하나하나 펼쳐 보이며 관객과 진실게임을 한다.

연극 '도둑맞은 책'이 올가을 4년째 무대에 올랐다. 슬럼프에 빠진 시나리오 작가가 천재적인 제자의 시나리오를 훔친 뒤 납치사건에 휘말리는 스릴러극이다. 2014년 초연된 이 작품은 영화 '내 심장을 쏴라' '아라한 장풍 대작전' 등의 각본을 쓴 유선동 감독의 동명 시나리오가 원작이다. 2011년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 수상작이기도 하다. 연출과 각색은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러브레터', 연극 '변신이야기' '아가멤논' '꼭두각시 놀음' 등의 변정주가 맡았다. 작가 서동윤의 실종을 소재로 인간의 이성과 본성을 탐구한다. 각박한 현실에서 타인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냉정하다 못해 인간성마저 상실하는 현대인의 내면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마취에서 깨어난 동윤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온다. 오랜 기간 함께 일한 보조 작가 조영락이다. '그가 왜 여기에…'라는 의아한 생각도 잠시. 동윤은 자신의 몸이 결박당한 채 휠체어에 묶여 있음을 깨닫고 번뜩 정신을 차린다. 영락은 동윤의 목숨을 위협하며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라고 독촉한다. 시나리오 제목은 '도둑맞은 책'. 슬럼프에 빠진 한 작가가 제자를 죽이고 그의 작품을 훔친다는 내용이다.

영락의 요구에 동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왜 당황하는 것일까. 영락이 제안한 시나리오는 바로 동윤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거부하는 동윤과 그를 끊임없이 옥죄는 영락. 그리고 이들이 함께 완성해야 하는 시나리오 뒤에 어떤 진실이 있을까.


연극 '도둑맞은 책' 공연 모습.

연극 '도둑맞은 책'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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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을 포기한 동윤은 결국 글을 써나가기 시작하고, 진실도 조금씩 베일을 벗는다. 화려한 액션이나 잔인함을 떠올릴 만한 어떤 설정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던 가해자의 내면 심리상태를 따라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창작자의 고뇌와 시기, 질투, 경쟁 등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이성과 본능이 싸우는 모습이 동윤만의 고뇌는 아닐 것 같은 동질감을 자아낸다.


무대는 지하공간의 음습한 분위기를 살려냈다. 또한 원작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을 2인극으로 축소, 인물의 극대화된 심리상태를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연 초반과 후반 무대 위 칠판에 투사되는 웹툰은 사건 진행을 알려주는 내레이터 역할을 해 극의 이해를 돕는다. 100분이라는 시간은 두 남자의 대립만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동윤이 완성해나가는 시나리오를 통해 영락이 동윤을 납치한 이유, 또 동윤이 숨겼던 진실도 드러난다.


동윤은 데뷔작으로 일약 스타가 되지만 그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후 계속된 실패로 깊은 슬럼프에 빠진 그는 대학가에서 시나리오 강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가 쓴 작품에 매료돼 그를 살해한 뒤 작품을 훔쳐 재기에 성공한다. 남의 것을 탐한 동윤의 욕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자의 아내까지 탐한다. '당신은 영혼을 팔아서 도대체 뭘 얻었어. 원하는 걸 얻었어, 결국 돈과 안정된 삶, 여자, 권력 뭐 이런 게 필요했던 거야'라는 대사를 쓸 때, 동윤은 미친 듯 몰입하며 광기와 희열을 느낀다.


영락은 자신이 동윤에게 배운 가르침을 거꾸로 상기시키며 그를 몰아붙인다. 납치의 피해자였던 동윤이 점차 고통을 잊고 환희로 빠져들어갈수록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오히려 높아진다. 동윤은 자기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의 주인공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창작물을 훔치는 데 익숙해져버린 비열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현재와 가상을 오가는 설정, 영락이 동윤이 완성한 시나리오를 들고 서슬 퍼런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며 끝까지 긴장이 풀어지지 않는다.


연극 '도둑맞은 책'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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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단순한 복수 이야기는 아니다. 욕망을 좇는 인간의 심리와 파멸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타인과의 비교, 경쟁, 이기고 싶은 욕망, 이기지 못한 데서 오는 좌절과 번민을 서사시처럼 보여주고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겠는가.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욕망의 길이 열렸을 때, 당신이라면 끝내 유혹과 갈망을 누르고 인간다움을 지킬 자신이 있는가"라고 말이다. 작품은 가해자의 파멸을 통해 권선징악을 말하기보다 욕망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취약한 본성을 고찰해볼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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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변정주는 제작노트에서 "과연 인간의 행동은 의지인가 욕망인가. 인간에게는 본성을 누르는 이성이 존재한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며, 각종 사건 사고들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담은 작품"이라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또한 그는 "도둑맞은 책은 극한 상황에 닥친 인간 내면의 이성에 대해 인간이 사람다움을 포기할 때 얼마만큼 추락할 수 있는지, 인간의 잔인하고 처절한 몸부림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배우 이현철ㆍ이갑선ㆍ이충주ㆍ이형훈ㆍ이우종이 출연한다. 오는 12월3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에서 공연한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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