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예안 이씨가 일가를 이루었던 곳, 솟을대문 앞 느티나무 그늘이 맑고 깊다


 별이 내려오는 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봤을 섬돌은 누구의 기억일까 구름은 어두웠다 밝아졌다 나뭇잎들이 신선한 손바닥을 부비는 동안

 윤기 나는 마루처럼 정갈하게 살았을 사람의 일생보다는 귀퉁이 얼룩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데


 한세상을 덧칠하고 걸레질하며 닳은 지문의 자리가 오백 년이 지나도록 파랗다 그 흔적을 어루만져 보다가 나는 행랑채의 딸이 되었다가,

 수많은 발자국이 지나갔으리라 낮은 돌담 사이 굽은 허리를 펴며 샛길이 먼저 사라지고 걷다 보니 길은 하나로 끝났다 산찔레가 피워 내는 한 묶음의 파문 아무도 모르는 파란


 대물림되는 가난이 잘 말린 건초처럼 목젖 아래 말을 가두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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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생의 뒤쪽, 먼 데서 온 나는 행랑채의 딸, 움푹 팬 섬돌 한가운데 회한의 저녁이 물소리를 내며 차오르는 중이다


 

[오후 한 詩]외암마을/김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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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위를 올려다보며 살고, 어떤 이는 곁을 바라보며 산다. 아무래도 좋다. 그 꿈과 행동이 아름답고 올바르다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또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아래를 더듬을 줄 안다. 나는 위나 앞이나 옆에 눈길을 주는 이들만큼이나 아래와 뒤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되도록 많았으면 싶다. 그 까닭은 그 자리에 시혜나 연민의 대상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래와 뒤에 있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겨 은혜를 베푼다는 따위의 생각만큼이나 권력적이고 탐욕스러운 정신의 위생학도 달리 없을 것이다. 아래와 뒤를 자꾸 살펴야 하는 이유는 그곳이 현재의 나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생의 뒤쪽'이라는 말은 '생의 뒤쪽이 이곳'이라는 뜻이다. "귀퉁이 얼룩"에 여전히 얼비친 "아무도 모르는 파란"의 끝자락이 곧 지금의 우리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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