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파면의 형식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이었지만 국가 최고 공직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린 주역은 주권자 국민이었음에 틀림없다. 권력에 신임을 부여한 국민은 그 신뢰의 파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제 의지로 다시 거둬들일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고전 원리를 매우 평화적으로 실천해냈다.
민주주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이 대단한 사건이 가능했던 것은, 그 모든 과정이 헌법과 법률에 의해 예정·조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난관에도 헌법가치만큼은 지키고자 했던 국민 모두의 의지가 결정적으로 이들 법의 역할을 독려했음은 물론이다. 비록 헌정사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적어도 우리 곁에 헌법과 법률이 살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몸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였던 주요 법률 위반 행위에 대해 재판을 시작한다. 형사법의 잣대에서도 위법이 확인된다면 과연 파면된 전직 대통령에게도 처벌을 내릴 수 있을지, 그리고 그 형벌은 어느 정도일지 등에 대한 사법 판단은 앞서 확인했던 살아있는 우리 헌법과 법률의 질적 수준을 가늠해 볼 엄중한 척도가 될 것이다.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이렇듯 특별한 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단지 이것이 민주주의 역사상 보기 드문 사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헌법학자의 눈으로 본 이 재판은 우리 헌법학 교과서에 특별한 항목으로 등장할만한 대역사의 한 장면이다. 특히 대한민국 헌법질서의 두 수레바퀴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역동적인 협력을 통해 서로의 헌법적 가치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당연한 조화의 그림을 그간 우리 헌정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온전한 법치의 형태로 정착되지 못했고, 법에 의한 통치의 논리는 국가권력이 아닌 국민들에게만 권위적 질서를 강요하거나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는 데 주력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민주와 법치가 상생하며 서로를 불러냈다. 기꺼이 상대의 밑거름 역할을 자처했다.
불과 6개월 전 우리 사회에는 후퇴한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과 자포자기, 꺾여버린 사법 정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왔을까. 그 절망의 찰나에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인 촛불은 참가한 시민들의 깊은 공감 속에 거대한 바다를 이루었고, 매서운 바람에도 꺼지지 않았으며, 바로 그 자리에서 혁명의 쉬운 물리적 성과가 아닌 '법치의 부활'을 부르짖었다. 민주주의가 잠들어 있던 법치주의를 깨워 일으킨 것이다.
철저한 비폭력적 민주의 열망에서 개시된 법치의 장에서 헌법재판소는 다수의 힘이 아닌 법의 논리에 근거해 대통령을 파면시켰다. 그 결론이 어찌 나오든 내일 (2일) 시작되는 재판을 통해 그간 시민의 민주적 삶을 방해했던 농단의 통치권은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법치의 움직임이 다시 우리 민주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놓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민주와 법치의 상생 역사는 아무나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물과 땀방울 속 민주주의를 달성한 성숙한 시민의식을 헌법과 법률의 온전한 작동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능력, 대한민국 헌법이 아홉 번이나 손질당하면서도 끝까지 우리들에게 요구했던 자유민주주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그냥 헌법이 아니다. '민주주의 헌법'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에 존재하는 헌법이면서, 그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킬 헌법이다. 우리는 지금 이 민주주의 헌법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장철준 단국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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