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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랑과 중년의 공허함…가을 타는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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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트렌치코트·석양 그리고 영화

영화 '가을햇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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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햇살'·'꽁치의 맛'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게 가을이란 남겨지는 이들의 슬픔·쓸쓸함
'만추'·'클로저'의 우연한 사랑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짧고 아련해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가을은 풍요롭다. 곡식을 수확하는 계절. 들판이 누렇게 익는다. 이를 바라보는 카메라도 함께 농익는다. 서늘한 바람에 이끌려 울긋불긋하게 물든 감성을 담아낸다. 붉은 석양, 떨어지는 낙엽, 펄럭이는 트렌치코트. 어떤 이는 푸르른 시절을 그리워하고, 어떤 이는 닳고 너덜해진 사랑에 괴로워한다. 인생의 끝자락을 준비하는 이도 있다. 다채로운 필름의 향연이다.
가을이 말하는 인생

가을을 가장 많이 조명한 감독은 누구일까. 아마 오즈 야스지로일 것이다. 주로 서민의 잔잔한 삶을 다뤘는데, 1960~1962년 가을을 소재로 한 영화 세 편을 발표했다. '가을햇살(1960년)',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년)', '꽁치의 맛(1962년)'이다. 모두 일종의 '홈 드라마'로, 가정의 해체가 주요 주제로 다뤄진다. 등장인물들은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기보다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묘사된다. 또 세상의 끝이 집을 나서는 것만큼 멀지 않게 표현된다.

영화 '가을햇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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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가 바라본 가을은 중년이다. 핵가족이 보편화되면서 남겨지는 이들의 슬픔과 공허함에 주목한다. 가을햇살은 오즈의 1949년작 '만춘'을 변형해 만든 작품이다. 아야코 미와(츠카사 요코)는 결혼할 기회가 많았지만 거절해왔다. 과부인 어머니 아키코 미와(하라 세츠코)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아키코는 딸이 희생한다고 생각해 적절한 남편감을 찾아주려고 한다. 아야코는 어머니가 재혼을 원한다고 잘못 생각한다. 아키코는 그런 딸과 여행을 떠난다. "너는 아직 젊어. 지금부터야. 어떤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어서 시집가렴. 엄마는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적막한 아파트에 홀로 남은 아키코. 아무렇지 않게 이부자리를 펴지만 서글프게 눈물을 훔친다.
오즈는 제한된 기교와 느린 템포로 비감 어린 슬픔을 자아낸다. 특히 일상의 사물을 어떤 감정을 상징하기보다 그 감정을 담아내는 도구로 활용한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때로 가장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복잡하게 보이는 인생은 갑자기 아주 단순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드라마를 영화로 보여주는 것은 쉽다. 배우들이 웃거나 울지만, 단지 설명하는 것이다. 감독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바를 보여줄 수 있다. 나는 드라마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을 느끼게 하고 싶다."

영화 '꽁치의 맛' 스틸 컷

영화 '꽁치의 맛'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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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도는 그의 유작인 꽁치의 맛에서 더 명쾌하게 나타난다. 꽁치는 아버지의 쓸쓸한 마음이 담긴 가을을 상징한다. 아내 없이 아들, 딸을 혼자 키워낸 회계사 슈헤이 히라야마(류 지슈)는 술자리에서 취해버린 중학교 은사를 집까지 배웅한다. 어린 시절 아름다웠던 은사의 딸이 결혼하지 않은 채 늙고 초췌하게 변한 모습을 마주하고 딸 미치코 히라야마(시마 이와시타)를 떠올린다. 그는 결혼시키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일은 계획대로 성사된다. 그러나 슈헤이는 자신이 점차 늙어가고 있고 혼자가 됐다고 느낀다.

이 영화는 밝고 유머러스한 저변에 적막감이 선명히 새겨졌다. 구성요소는 단순하다. '만춘(1949년)'과 가을햇살을 연상시키는 이야기. 색채는 억제됐고, 관찰하는 각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것도 모자람이 없으며 이질적이지 않다. 다시 보여주는 가을이지만 상당히 깊은 가을이다. 겨울이 언제나 가까이 있었지만, 이제 내일이면 겨울인 가을이다. 여기에는 어머니를 향한 오즈의 애틋한 마음이 담겼다. 그와 함께 각본을 쓴 노다 코고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영화 '꽁치의 맛' 스틸 컷

영화 '꽁치의 맛'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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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작업이 한창이던 1962년 2월에 오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신경통을 앓았는데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나는 괴로워하던 오즈에게 집에 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그는 '아직 괜찮아.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 그해 5월 여든여덟 살이 될 때까지 돌아가시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녀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오즈의 일기에서 짧은 메모를 발견했다. '계곡의 아래는 이미 봄이네. 벚꽃들이 구름처럼 피어나네. 그러나 여기엔 활기 없는 눈, 고등어의 맛. 꽃들은 우울하고 셰이크의 맛은 더욱 쓰다.'"

가을의 사랑은 아프다

가을의 사랑은 낯설게 찾아온다. 마이크 니콜스의 '클로저(2004년)'에서 런던의 신문사로 출근하던 댄(주드 로)은 인파 속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앨리스(나탈리 포트만)를 보고 강한 끌림을 느낀다. 횡단보도에 마주선 그녀가 달려오던 차에 치여 쓰러지자 그는 주저 없이 달려가 보호한다. 앨리스는 누운 채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 낯선 사람."

영화 '만추' 스틸 컷

영화 '만추'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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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감독(47)의 '만추(2010년)'에서 애나(탕웨이)와 훈(현빈)도 우연히 마주친다.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애나는 모친상을 당해 3일간 휴가를 받는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탄 시애틀행 버스에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차에 오른 훈에게 차비를 빌려준다. 훈은 나중에 돈을 갚겠다며 시계를 채워주지만 애나는 무뚝뚝하게 돌아선다. 훈은 사랑이 필요한 여인에게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는 이답게 능구렁이처럼 간격을 좁히려고 한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영어 실력처럼 어색하고 서툴기만 하다.

안개가 자욱한 시애틀에서 그들의 사랑과 갈등은 이질적으로 나타난다. 이 미묘한 정서는 음악을 다섯 곡밖에 쓰지 않을 만큼 영화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여기에는 탕웨이의 차분한 시선과 호흡도 한 몫을 한다. 훈을 보다가 아래를 응시하거나 고개를 돌리고 대사 중간에 공백을 둬 관객이 애나의 마음을 유추하게 한다. 둘은 진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예고 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아련한 결말에 다다른다. 커피 두 잔을 손에 든 애나의 텅 빈 주위를 따라붙는 영상에서 공허함이 맴돈다.

영화 '클로저' 스틸 컷

영화 '클로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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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의 사랑도 짧고 슬프다. 강렬했던 첫 만남처럼 멀어지는 것 역시 한순간이다. 네 남녀의 얽히고설킨 로맨스를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모두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진다. 각기 다른 진실을 향한 갈망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이 아픔은 유일하게 한 남자에게 집중한 앨리스의 대사로 대변된다. "보여줘 봐. 사랑이 어디 있는지.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몇 마디 말들은 들리겠지. 그렇게 쉬운 말들은 공허할 뿐이야."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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