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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희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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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 - 여름밤 동침하는 '죽부인'의 비밀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자정 넘어 잠이 깼는데, 창 밖엔 매미소리 천지다. 후두둑 지나간 비 끝에 또록또록해진 정신으로 사랑생각이 간절한 모양이다. 부르는 자와 듣는 자, 어둠을 뚫고 오가는 연애의 열대야.

나이 들었단 얘긴가, 요즘이라면 죽희(竹姬) 생각이 자주 난다. 죽부인(竹夫人)이라고도 하는 그 여인 말이다. 여름밤 오직 잠 못 드는 사내의 포옹의 허공자리에 들어앉기 위해 만들어진 이 피서용품은 속을 텅 비워 가볍고 탱탱한 대의 기운이 살아 단단한 의지가 되고 무엇보다 살결이 닿을 때 서늘한 감촉이 좋다. 머리로 베는 베개가 아니라 안고자는 베개다. 잔소리도 없고 질투도 없으며, 여름 체온이 뜨겁다 물리치려고도 하지 않으니, 그만한 덕이 없다.
죽희는 잘 마른 대를 참숯에 지지면서 엮어 만든다. 길이는 사람 키에 조금 못 미쳐야 버겁지 않고 둘레는 가슴 안에 들어오는 한 아름이면 된다. 마름모 격자 구멍이 나도록 성글게 짜는데 못이나 철사를 써선 안되고 색깔을 내려고 다른 걸 칠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저 대나무의 푸르고 누런 빛과 시원하고 굳고 가벼운 기운만으로 충분하다. 성글게 하는 뜻은 바람이 이불로 쉽게 들어오도록 함이다. 삼베 홑이불을 덮는둥 마는둥 하고 다리 한짝을 척 걸치면 편안한 기분에 잠이 절로 스며든다.

죽희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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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곡의 가전체 소설 '죽부인전'은 그 물건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문란한 당시 세태를 꼬집자고 대나무와도 같은 절개를 지닌 여성상을 그려낸 것이다. 중국에도 같은 이름의 소설이 있는데, 송의 장뢰, 원의 양유정이 지었다. 이 스토리들은 제사 도구로 쓰이는 죽제품을 의인화한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옛 설화를 들여다 보면 대나무는 여성성을 지니는 게 공통점이다. 중국의 반죽고낭(斑竹姑娘, 얼룩무늬 대의 소녀) 이야기는 금사강 유역에서 전해지는 스토리다. 대나무가 많았던 이 지역에선 관청이 대를 팔아 장사를 했다. 한 청년이 대나무를 숨겨놓았는데 그 속에서 소녀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펼쳐진다.

일본의 고대설화 '죽취물어(竹取物語, 다케토리 모노카타리, 대나무에서 얻은 이야기)'에도 대나무 여인이 나온다. 죽세공을 하는 노인이 대를 베려고 다가가니 광채나는 대에서 한 소녀가 나왔다. 그녀의 이름을 가구야 히메(가구야 여인)이라 붙였다. 그녀는 달에서 온 여인으로 뭇총각들을 설레게 하다가 다시 승천하고 만다.
대나무는 사군자의 하나로, 옛 사람들이 초목을 스승 삼아 덕을 배우려 하던 그 대상 중의 하나이다. 사철 푸른 것, 곧고 굳은 것, 속은 텅 비워 가벼운 것, 마디마다 제몸을 추스려 꿋꿋한 절개(節介)를 지닌 것, 높고 서늘한 것. 이 모든 품성이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바가 있다. 추사 김정희가 평양 기생 죽향(竹香)에 눈을 준 것도, 그 이름의 힘이 절반이 아니었을까 싶다.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으면서도 향기롭고 담담한 그 태도가, 반죽고낭이나 가구야 히메의 현신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담양에서 명인이 만든다는 죽희를 하나 들일까 하는 마음을 품다가, 부질없는 사치라며 스스로를 비웃는다. 향그런 대의 내음을 맡으며 잠드는 천국이야 나무랄데 없겠지만, 여름 지난 다음 세 계절 동안 지천으로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을 그녀가 안쓰러울 게 틀림없다. 그 텅빈 것을 안는 마음이라면, 세상의 무상을 이해하는 태도와도 같으니, 그것이 없음을 안아보며 오늘은 잠을 청해보는 것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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