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말해주지 못한 1948년 4월 3일 제주의 기억
[아시아경제 ]나는 역자들의 배려로 지난해 10월 열두 권으로 완역된 '화산도'의 번역원고를 처음 읽는 호사를 누렸다. 초벌 번역을 다듬는 교열의 행운도 누리면서 소설의 전언이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낳을지 예감하는 희열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 희열은 저 80년대 후반,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출간될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사서 읽었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만큼 '화산도'는 이야기의 높은 흡인력으로 무장한 다성적인 작품이다. 내가 아는 몇몇 지인들은 '화산도를 읽는 모임'도 만들었고, 그런 모임에 참여한다는 풍문을 전하기도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아 6개월이 지난 지금, 꾸준한 구매 반응에 힘입어 출판사에서는 며칠 전 개정판 1권을 출간했다. 올해 안으로 오류를 바로 잡은 개정판을 완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화산도'는 휴화산처럼 잊혀진 4.3의 기억을 활화산처럼 분출시킨 이야기의 세계이다. 미해결의 역사, 잊힌 기억을 불러내어 장대한 이야기로 만들어낸 작가의 노고를 근 20년 만에 접하게 되었다니…. 일본문학 전공인 번역자가 작품에 기울인 오랜 공력을 잘 아는 나로서는 최초의 한국어 독자로서 '정독의 즐거움'을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화산도'가 2015년 4.3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로서는 이 작품을 모두 읽은 한국의 독자가 나 말고 과연 누가 있을까, 하는 즐거움을 은밀하게 곱씹었다.
4.3의 기억이 한국소설사에 등재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현기영의 '순이삼촌'(1978)이 시발점인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구십(九十)을 넘긴 노 작가는 1960년대 중반 '재일조선문학예술가동맹' 기관지에 한글로 연재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중단하고, 1976년부터 다시 일본어로 연재하는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마침내 1997년 일곱 권의 단행본을 완간하였다. 30여 년의 기나긴 기간이었다. 노 작가의 4.3은 한국소설사에 비해 무려 10여 년 이상 앞설 뿐만 아니라 여타 작품들을 압도한다.
노 작가의 4.3 이야기를 찬찬히 둘러보면 그 안에는 그 시기 제주의 일상적 공간이 촘촘히 포진해 있다. 그 공간은 나날의 일상에서부터 정치와 사회경제, 음식문화에 이르는 다채로운 층위를 담아낸다. 또한 그 공간은 해방을 맞이한 후 가파르게 전개된 남북분단의 충격이 점차 고조되고 남한만의 단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진보세력과 제주 민중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으며 어떻게 저 비극의 4.3으로 이행되어 갔는지를 보여준다. 방대한 규모에 걸맞게 이야기는, 세계냉전체제의 등장과 함께 관철된 남북분단의 여진이 어떻게 제주에서 분출되면서 동족학살의 비극으로 이어졌는지를 전면화한다.
'이방근'이라는 존재는 '화산도'가 창안한 가장 성공적인 인물이다. 그는 '햄릿'의 고뇌하는 인간상을 연상시키기에 족하지만, 햄릿처럼 고뇌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게릴라가 된 제주인들이 혹독한 소탕작전으로 죽어갈 때 이들을 구출하여 밀항을 돕는 행동하는 지성이기도 하다. 그는 재혼을 통해 봉제사(奉祭祀)와 생육(生育), 가업 승계라는 장자의 책무 일체를 거부하며 아버지와 대립하는 자유주의자, 소학교 시절 봉안전(奉安殿)에다 방뇨하며 궁성요배(宮城遙拜) 의례를 위반하고 일제 말기에는 사상범으로 검거되어 전향을 표명한 뒤 해방 후에는 일체의 사회활동을 사양하는 성찰적 개인이다. 이런 면모는 해방 직후 투옥경력을 훈장처럼 내세우던 자들과 친일분자에서 반공주의자로 이행한 경우와는 변별된다.
일본에서는 '화산도'를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빅토르 위고의 '93년'에 비교하며 '일본어문학'이자 '세계문학'의 성과로 언급하지만, 이제 우리 앞에 한국어로 완간되면서 독자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분단문학을 연구해온 내 경우, 연구 방향을 전면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곤혹스러움을 갖게 한다. 그 곤혹스러움은 '4.3의 역사화'만으로 그치지 않고 남과 북, 제국 일본과 전후 일본,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아니하는 작가의 지점과 시야에서 온다. 이 지점과 시야는 그간 남한중심주의에서 다루어온 남한의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거둔 성과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을 넘어선 '인간애', 인간의 품격과 향기를 내뿜는 인류 보편적 가치 생산과 그에 따른 문학적 성취는 곤혹스러움이자 동시에 감동이다.
유임하 한국체대 교양과정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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