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알바시네- '레버넌트' 속에 들어있는 진짜 의미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영화는 인간에 대한 시선을 놔버릴 수 없다. 설령 인간이 전혀 나오지 않는 영화에서조차도 말이다. 인간에 대한 끈질긴 시선 중에는, 초인(超人, 슈퍼맨)도 그 한 줄기를 형성한다. 거대한 형상의 인간이나 괴수, 혹은 동물의 형상을 한 인간, 기계인간, 요괴인간, 심지어 아주 작은 인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형체와 한계를 벗어나고픈 충동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형체를 바꾸고 싶은 그 욕망보다 더 강한 건, 아마도 '영혼의 형질변경'의 욕망이 아닐까 싶다. 육체 속에 들어있는, 인간 삶의 의지를 이끄는 무엇에 대한 탐구와 동경은, 영화의 영원한 갈증이며 '문제의식'이지 싶다.


영화'레버넌트'의 디카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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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가 인간을 만들면서 그 안에 넣어준 제1 프로그램은 뭘까. 그건 생명체 전체를 관통하는 명령이다. "살아라." 생명을 부여받고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저 '생존명령'을 지상과제로 떠안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레버넌트(REVENANT)'는 인간의 생의(生意, 생명 의지)를 날 것으로 보여주는 인상적인 영화다. 혹자는 말한다. 왜 우리가 저런 처절한 사투를 봐야 하는 거지? 대체 저 속에 무슨, 음미할 가치가 있단 말인가? 이 영화는 '게임'이 지닌 규칙과 원칙과 매력들을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게임에는 가치 실현이 없다. 그것에는 오직 게임만이 있을 뿐이며, 고난과 위험과 적과 동지의 배신 따위만 있을 뿐이다. 죽으면 '게임 오버'이며, 지는 것이며, 가치도 소멸하는 것이다. 이기는 것이 가치이다. 제목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을 가리키는 '레버넌트'인 것도, 이 영화(혹은 스토리, 원작은 마이클 푼케의 2003년 동명의 소설이다)의 프레임을 잘 설명해준다.


왜 살아야 하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저마다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이유가 없다 하더라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 그 점이 우리 생이 지닌 엄혹한 '하나의 문제'이다.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 개척시대 초기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전설적인 사냥꾼 휴 글래스의 영웅담이다. 휴 글래스 역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원래 강인한 기질과 체력을 지닌 사람이지만, 거기에 더하여 결코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지니고 있다. 사랑하는 인디언 아내가 낳은 아들 호크를 죽인 자를 찾아내 복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몇 번을 지옥 문턱까지 갔다 왔지만, 죽기를 거부하고 살아났다. 복수를 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임은 그런 것이다. 지옥 문턱에서 '절망'을 시인하는 눈을 깜박이는 순간들을 만나면서, 관객인 나는 나도 몰래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것이 디카프리오와 관객이 공유한 '게임의 기운생동'이었을 것이다.

누구와 싸워 이겼는가, 디카프리오의 게임 원본보기 아이콘


이 영화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시적 풍경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것은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라, 끝없는 살육과 탐욕과 배신과 흥정이 오가는 '추악함'을, 죽죽 벋어오른 원시림 아래에 숨기고 있다. 함께 영화를 보던 아내는, 저 피의 장면들만 잘라버린다면 더 없이 아름다운 비경인데...하면서 괜히 혀를 찼다. 리족을 포함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총을 찬 문명지의 사냥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싸움은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의 무기나 지략이나 전력(戰力)도 원시 공간에서는 우열을 쉽게 가리기 힘들다. 모두가 모두의 적이며, 모든 곳이 사선(死線)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이런 지옥으로 만든 '문제 유발자'는 당연히 서구에서 온 침입자들이지만, 그런 전투에서 생존을 꾀하는 원주민들의 사나움과 잔혹함도 만만치 않아졌다. 여기엔 어쩌면 선악 개념이 없다. 이기는 자, 살아남는 자가 선이다. 휴 글래스가 죽을 힘을 다해 걸어간 길은, 어쩌면 이 원시림 아래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 걸어가다 중도하차한 길이기도 하다. 글래스가 인디언 아내와 혼혈 자식을 둔 사람이라는 점은, 문명과 원시의 '가치 중립'을 위한 의미있는 설정일 수 있다. 미 대륙을 '접수'한 이들이 원주민에게 지니는 부채 의식은, 오랫 동안 '영화의 고정적인 시선'을 만들어냈다. 원주민이 '악'이라는 시선과 '선'이라는 시선이 뒤엉키며 서구 점령자들의 복잡한 무의식을 형성해왔을 것이다. 영화는 그 선악의 지점들을 정교하게 털어내고, 오직 게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놨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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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지는 황막한 대륙의 겨울풍경은, 눈을 벨듯이 아름답다. 마침 지금 혹한이 찾아온 시절인지라, 저 영화 속에서 느껴지는 사무치는 한기가 200% 리얼리티로 다가운다. 우리 욕설 중에도 '얼어죽을'이라는 욕이 있지만, 얼어죽는 일은 인간 공포의 한 원형이다. 항온(恒溫)동물인 인간은 저 기온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원시시대부터 겨울을 두려워한 이유는 체온을 유지할 수 없는 조건에서 살아남는 일이 힘겨웠기 때문이다. 휴 글래스가 만난 '지옥'은 바로, 저 겨울의 사막과 암벽과 물 속이다. 만신창이가 된 인간이 겨울이 주는 시련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이들은 디카프리오가 망가지는 구경을 하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다른 한 가지를 못 본 것이다. 잘 생긴 디카프리오의 외형이 그토록 거칠게 망가지면서, 그 내면에서 활화산처럼 일어나는 생명의 찬연한 에너지가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를 웅변하고 있는 사실을 말이다.


곰과 씨름을 해서 결국 그것을 죽인 남자는, 곰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짐승처럼 살아난다. 죽은 말의 내장을 벗겨내고 그 속에서 온기를 유지하는 그는, 말의 영혼이 되어 벌떡거리는 심장을 유지해낸다. 결국 그 사무치는 추위를 이긴 것은, 짐승이 지닌 본능적이고 맹렬한 '생의' 그 자체이다. 악으로 등장한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 또한 하나의 짐승이다. 그는 문득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고통을 이겨낸 아버지가 극한에 이르러 다람쥐를 숭배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짐승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아들인 자신이 그를 쏴버렸다는 것. 왜 하필 다람쥐였을까. 우스꽝스러운 장면이기도 하지만, 짐승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비슷한 코드를 증언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피츠제럴드는 다람쥐를 쏴버리듯 아버지를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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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극사실이라 할 만큼 리얼리티를 강조한다. 배경이나 장소의 리얼리티 뿐 아니라, 연기자의 리얼리티도 마찬가지다. 알레한드로 야냐리투 감독과 엠마뉴엘 루베즈키 촬영감독은 일인칭의 극단적 클로즈업과 파노라마의 장대함까지를 동원해 생생함을 돋웠다. 영하 30도의 눈밭과 물속. 디카프리오의 '전신 투신' 연기는 보는 이를 전율시킨다. 야냐리투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싶었다." 나는 이 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디카프리오 혹은 휴 글래스의 게임은, 피츠제럴드라는 일개 악당과의 싸움이 아니라, 불가능이란 신(神)과의 싸움이라는 얘기도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어찌해볼 것이 없어보이는 극한에서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 생명의 실낱같은 불을 지펴올리는지, 보여준 레버넌트는 '죽음의 신'과 벌인 한바탕의 위대한 몸싸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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