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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무전유죄, 유전중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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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희 유통부장

이초희 유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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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서울고법 형사12부는 1600억원대 횡령 및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지난 2013년 7월 기소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에게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지난해 9월 대법원이 '배임혐의에 대한 2심 판단이 법리를 오해한 부분이 있다'고 파기환송해 집행유예가 될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을 깬 선고였다.

미리 밝히자면 이 글은 '재벌을 사면시켜 경제활성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내용이 아니다. '사면보국'의 논리는 이제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솔직히 낯간지러울 정도로 지겨운 스토리다.
재판부는 "재벌 총수라도 법질서를 경시하고 범죄를 저지르면 엄히 처벌받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게 민주적인 경제발전에 이르는 길"이라며 선고 배경을 밝혔다. 틀린 구석 하나 없이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이 회장은 지금 만성신부전증에 '샤르코마리투스병'이라는 이름도 생경한 유전병을 앓고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이 병은 '유전성 신경장해'라고 명시돼 있다. 쉽게 말해 관절은 굳어가고 근육이 사라지는 병이라고 한다. 이름도 증상도 해괴하게 이를 데 없지만 지금 상태로는 구속집행정지가 끝나는 3월 이후에는 꼼짝없이 감옥에 들어가야 한다.

물론,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고 귀천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 추상같이 집행돼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쯤에서 법적처벌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따져 보자. 고대의 형벌은 보복의 원칙에 따라 집행됐다. 간단히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충실하자는 것이었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형벌의 의미는 많이 달라졌다. 수감이라는 제도는 일반 국민들을 보호하고 범죄자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는 게 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 종종 여론은 범죄자들에 대한 응징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회장이 지금 처한 상황을 보자. 꾀병이 아니라는 데에는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다. 지금 상태로 수감되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과장처럼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 회장에게 사회적 보복을 가하는 게 목적이라면 모르지만, 현대적 사법정신에 따라 '교화'가 목적이라면 지금 구속집행을 강행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형벌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도 범죄자를 처벌할 때 최소한의 인격권과 생존을 보장해줬다. '육전조례'에 보면 당시 수감시설이었던 전옥서에 갇힌 범죄자가 중병에 걸렸을 경우 증상이 가벼우면 보석하고, 무거우면 상당한 약물로써 구료해야 한다고 명시해놨다.

우리가 아는 곤장제도도 '한 번에 30대 이상 치면 안 되고, 한번 심문하면 3일 이내에 다시 심문할 수 없으며, 죽을 위험이 있는 죄인에게는 형벌을 중지한다'고 돼 있다. 조선시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죄인 보호에 충실한 매뉴얼이다.

지난해 태광그룹 전 상무이자 이호진 회장의 모친인 이선애 여사는 병원과 감옥을 오가다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고(故) 이 여사는 수천억원대 비자금 조성혐의로 아들과 함께 실형을 선고 받고 84세의 나이에 구속수감됐다. 고령에 뇌졸중 등 각종 합병증에 중증치매까지 겹쳤으나 수감, 형집행정지, 재수감을 거듭하다 3개월만에 세상을 등졌다.

고인은 수감과 병원생활 이후 3년만에 불귀(不歸)의 객(客)이 돼 집으로 돌아왔다. 상주여야 할 이호진 회장은 투병중인 간암이 악화돼 모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못했다. 결국 맏사위인 허승조 GS리테일 부회장과 장손이 빈소를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인 범죄자였으면 감형이나 사면이 행해졌겠지만 기업인이기 때문에 되레 역차별을 받은 셈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칼럼은 재벌을 풀어줘서 경제를 살라지는 얘기가 아니다. 재벌이든 누구든 사람은 살리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재판 기간 동안 이 회장은 부친을 잃고 모친 또한 자신을 찾아 위로했던 당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의식불명의 상황에 놓였다. 재벌 회장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 봤을 때 딱한 일이다. 법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법을 만든 것도 집행하는 것도 결국엔 사람이다. 때로는 손속에 사정을 두는 융통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초희 유통부장 cho77lov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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