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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年 박근혜'와 '혼용무도'의 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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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우리는 죽음의 날에 태어나던 날을 기억할 수 있지만, 태어나던 날에 죽음을 기억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그게 가능하겠지만 이 지독한 일회용의 삶을 사는 우리에겐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그래서였던가. 어린 시절 어머니는 죽어가는 이와 죽은 자의 모습을 피하지 말고 보아두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장차 있을 나의 죽음을 또렷하게 직면하는 일이 삶에 큰 도움을 준다는 오래된 지혜였다. 우리의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아마도 그 방법 밖에는 없지 않을까.

2012년 8월에 전직 중앙일보 사진기자 최재영은 안국동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오랜 현장 생활에서 건져올린 사진작품들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역대 정치인들의 처음과 끝을 맞물려 전시하는 의미심장한 기획이었다. 사진들을 곰곰이 들여다 보았다. 시작할 때의 대통령들은 "나만은 저 떠나는 대통령과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고, 떠날 때의 대통령들은 이제 시작하는 대통령에게 "당신도 별 수 없을 거요"라는 표정으로 씁쓸한 연민을 드러내는 것을 읽었다. 나는 그 전시의 카피를 써주었고 '권력무상'이란 제목을 달아주었다. 그 카피는 이러했다.
"시작하는 날에 끝날을 기억하면, 끝날에 시작하는 날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을 터 인데. 권불오년(權不五年)이라, 영원한 왕좌에 앉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만과 부패와 집착이 끼어들 수 밖에 없느니, 대선에 나서는 이여,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기억하라. 그것이 자신의 곧 자신의 모습이 될 것이다. 虛虛(허허)대권이여, 대한민국 권력들 그 어리석음의 윤회여.

대통령 대권을 꿈꾸는 이여, 시작할 때 끝을 기억하라. 권력무상 (權力無常)! "

희망 차게 출범을 서두르는 새 대통령에게는 잔칫집에 재를 뿌리고 초를 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는, 저 경고와 단언(斷言)은 권력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정교한 예언과도 같은 '사실'로 변했다. 민주화의 표상이었던 대통령은 재임기에 참사가 끊이지 않아 부덕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IMF 관리체제라는 경제 국치를 초래한 불명예를 안았으며, 뒤이어 제대로 야당집권을 이뤄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을 일궈냈으나 언론탄압과 자식들의 정치적 부정으로 얼룩이 진 채 떠나갔으며, 청문회의 스타였고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의 우상으로 노풍이라는 바람을 일으킨 스타대통령은 후반 들어 정치적 무능으로 한겨레 사설에까지 부지런히 씹히는 치욕을 겪고 퇴임 이후엔 자잘한 부정들이 들춰지며 부엉이 바위에 서는 지경에 이르렀고, 산업화의 표상으로 기업경영을 국가경영에 응용해보겠다던 대통령은 4대강의 불도저 정치의 무리수들로 흙탕을 일으켰고 국가적 금융위기로 나라곳간이 텅텅비는 지경을 만들어내 말년에는 당시 여당으로부터도 참담한 외면을 받은 바 있다. 그 이전은 더하다. '하야'한 대통령이나 심복의 총격을 받은 대통령, 쿠데타로 집권했다가 감옥까지 간 대통령은 거론해서 무엇하겠는가.
'丙申年 박근혜'와 '혼용무도'의 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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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집권기간(2013-2018)으로 보자면 중반을 넘어선 2015년 연말. 박근혜대통령은 지금쯤 메멘토 모리의 지혜를 얻었을까. 세월호사건과 메르스사태에서 보여준 정치적 무기력과 무능은 국민에게 지워지지 않을 실망감과 절망감을 심은 바 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외치며 시작했던 따뜻한 근혜노믹스는, 시장과 기업과 민생에 켜진 각종 빨간 불들과 만나면서 '기업살리기'로 원칙과 우선순위를 바꿨으나 이를 막아선 야당과의 소통력 미숙과 권위적 정치방식으로 국회설득에 거듭 실패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임금피크제와 유연한 해고와 같은 예민한 문제들로 격화된 노동계 반발,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빚어진 시민 반발을 '마스크 금지'로 대응하여 조롱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경제 위기를 강조하며 입법부의 태업을 비난하면서도, 경제각료들을 빼내서 총선의 전사로 내보내는 이중적이고 정략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두 개의 섬뜩한 '극언'들이 떠돌고 있다.

하나는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혼용무도(昏庸無道)'다. 교수들은 연말마다 다양한 사자성어를 내놓고 있는데, 2015년의 상황을 압축한 저 말이 가장 신랄하다는 평이다. 저 말은 정확하게 현직 대통령을 겨누고 있으며 두루뭉술한 표현이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저 표현은,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이 법과 원칙 없이 세상을 말아먹는다는 준렬한 고발이다. 혼군은 판단력이 흐린 어리석은 리더이며 용군은 행동력이 떨어지는 못난 리더이다. 무도(無道)는 취임 초부터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스스로의 입지를 세워왔다고 생각하는 박대통령에게 치명적인 반격이다. 대통령이 입으로는 법과 원칙을 외쳐왔으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판단력과 행동력이 떨어져 오히려 법과 원칙들을 파기하고 있음을 이땅의 지식인들이 입 모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이 무서운 뜻을 대통령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또 하나는 내년 간지인 '병신년'을 이용해 노골적으로 여성 대통령을 조롱하는 세간의 입방아들이다. 얼핏 보면, 무단히 대통령을 폄하하려는 자들의 말장난 수작처럼 보이지만, 권력 후반기의 민심 속에 들어있는 불만을 지피는 키워드로 굳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김영삼 정권 말기에 있었던 '부덕 무능한 대통령'론과 김대중 집권 때의 '부정직한 대통령'론, 노무현 때의 '뭘해도 놈현탓', 이명박 때의 '삽질대통령'이 슬금슬금 권력을 절뚝거리게 했던 것처럼 민심은 언어 속에서 피어난다. 혼군과 용군(판단력과 행동력의 미숙)의 함의가 '丙申(병신)' 두 글자 속에 심각하게 서성거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면, 그것은 지도자의 둔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올해보다 갑절은 힘겨울 거라는 내년을 맞으며 저 혼군과 용군의 정치가 저 위기를 타개할 무슨 대책을 내놓을지에 대한 국민적 근심이 '병신년' 세 글자에 담겨있음이 무서운 일이다.

대통령 5년은 짧지 않지만 길지도 않다. 비정(秕政) 5년이라면 너무나 길고, 선정(善政) 5년을 베풀기엔 짧다. 권력을 놓을 때의 불안을, 권력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을 우린 너무 많이 보아왔다. 선거나 요직에 '진실한 사람'이란 이름의 충견들을 줄세워 비판받는 권력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의 실패를 우린 너무 많이 목격했다. 지금 대통령이 해야할 일은, 더이상의 권력 욕심을 비우고 권위를 더욱 굳건히 세우려는 노력을 중지하고 대통령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아닐까. 대통령은 특정 지지기반 위에 얹혀 그들의 좁은 여론과 좁은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그 상식과, 모든 사심을 떨치고 이 땅의 국민 모두를 위해 남은 열정과 지혜와 진심을 다 쏟아붓는 자리여야 한다는 그 당위. 그 상식과 당위로 돌아오는 것이, 대통령이 권불오년의 권력무상을 최소화하고 말년에 되풀이 된 비극들을 줄이는 최선의 안전장치일 것이다. /빈섬.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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