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1주기…인혁당 사형수 구명운동하다 강제추방된 시노트 신부를 기억함

[이명재 논설위원의 책 다시보기] 1975년 4월30일 오후 7시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는 벽안의 신부가 있었다. 중앙정보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비행기를 타기 전 그는 ‘사랑하는 한국을 떠나면서’라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끼던 한국과 한국국민의 곁을 오늘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진심으로 슬프고 마음 아픕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오늘 내가 떠나게 됨으로써 앞으로 여러분의 고난과 시련을 같이 나눌 수 없게 되고 여러분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게 되고 비록 내가 죽음에 직면한다손 치더라도 여러분을 위해서 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국정부로부터 강제 출국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고 했던 이 신부의 이름은 제임스 시노트, 우리말 이름으로 ‘진필세’라고 불렸던 이다. 지금 많은 이들에겐 이름이 낯설겠지만 지난 70년대 엄혹했던 유신시절에 어느 한국인보다 한국의 어두운 그늘,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곳을 찾아 뛰어들었고, 시련을 당하는 이들 곁에 함께하려고 했던, 그러다가 결국 정부에 의해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쫓겨나가야 했던 인물이다.
한국을 사랑한, 아니 ‘아픈 한국’을 사랑했던 시노트 신부. 그의 선종(2014년 12월23일) 1주기를 맞아 펴낸 이 책은 그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추모의 마음을 담았다.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 농성장에서 기자들과 함께 농성을 하다 경찰에 연행되는 시노트 신부.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 농성장에서 기자들과 함께 농성을 하다 경찰에 연행되는 시노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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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제 서품을 받고 난 뒤 한국으로 파견된 것은 1960년 8월. 그 후 14년간 그는 인천교구 영종도본당 등에서 ‘세상사와 상관없이 오직 교회 안에서 사목에만 열중하던 온순한 사제’였다. 그러나 이 ‘온순한 사제’가 거리의 투사가 된 것은 어쩌면 가난한 아일랜드 이주민계의 후손이었던 그의 온유한 품성 속에 본래 내재돼 있던 예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국의 치열한 현실과의 인연 또한 운명적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시노트 신부에게 한국 선교사로 파견할 것을 통보한 날은 1960년 4월19일이었다.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혁명을 일으킨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영종도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는 등 목회자로서 삶에 충실하던 그는 자신이 1974년에 ‘두 가지의 마비’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하나는 어느 청년이 자신에게 준 충격이었다. ‘전 군’이라고 불린 이 청년은 어릴 적에 결핵골수염을 앓으면서 병과 영양 결핍으로 성장이 멈춘 상태였고, 멀리서 보면 어린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시노트 신부는 전 군을 만난 지 한 달 뒤부터 자신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내 삶의 변화는 ‘마비’에서 풀려남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비판 능력’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나는 ‘마비’라는 병이 사라지고 나서야 내가 그 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5년 4월9일 인혁당 사건 8명의 사형장 앞에서 항의하다 경찰에 끌려가는 시노트 신부.

1975년 4월9일 인혁당 사건 8명의 사형장 앞에서 항의하다 경찰에 끌려가는 시노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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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뒤에 찾아온 또 다른 마비에서의 깨어남, 그것은 인혁당 가족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로써 그의 삶은 온전히 방향을 바꾼다. 시위에 앞장서던 대학생들이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조작되는 한국 사회의 실상을 조금씩 알게 되고 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것은 불쌍한 이들, 수난을 당하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한 이중의 깨달음이었고, 시노트를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그 후 시위 현장에선 이 거구의 신부가 경찰에게 사지를 붙들려 끌려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지학순 주교의 병실로 외신 기자에게 신부복을 입혀 들어오게 해서 유신독재의 실상을 외국에 알리게 한 것도 그였고, 75년 3월 17일 새벽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운동의 마지막 순간을 기자들과 함께 맞았던 유일한 외국인도 바로 그였다.
그러나 1975년 4월9일 인혁당 사형수 8명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항의하던 시노트 신부는 그해 4월말 체류기간 연장 불허로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미국에서도 한국의 실상을 알리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여러 번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20년이 흐른 뒤에야 그리던 '제2의 조국'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을 잊지 말자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다. 그는 재입국 이듬해인 2004년 ‘1975년 4월9일’이란 책을 내 인혁당 사건을 생생하게 증언하면서 "희생자들의 사형집행은 전 생에서 가장 아프고 슬픈 체험이었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 8명은 2007년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책의 저자인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에게 시노트 신부는 여러 겹의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74년 김 이사장이 20대의 피끓는 기자로서 참여했던 동아일보 양심선언에 방아쇠를 당기게 했던 것 중의 하나가 시노트 신부가 함께했던 양심수 가족들과의 기도모임이었다. 그 덕분에 동아일보는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라는 것을 알리는 작업을 하던 이들에 대한 소식을 유일하게 보도하게 됐고, 시노트 신부는 이 신문사에 자주 출입했다. 동아일보가 광고탄압을 받을 때는 여러 번 격려광고를 실었다. “시노트 신부가 편집국에 들어서면 ‘와, 신부님 오셨다’고 소리 지르며 달려가던 정경이 지금도 뚜렷이 떠오른다‘고 김 이사장은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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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장처럼 시노트 신부를 사랑과 정의의 사도, 넓은 ‘우산’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힘을 합쳐 낸 이 책은 70년대 한국의 정치적ㆍ사회적 상황과 함께 작가이자 시인이며 화가로서 시노트 신부의 면모도 보여준다. 그가 쓴 소설 ‘영종도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의 고백이다.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색상이 인상적인 그의 그림에는 ‘8’이라는 숫자가 자주 나오는 게 눈길을 끈다. 꽃도 여덟 송이, 나뭇가지도 여덟 개였다. 그것은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8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산꼭대기에는 거룩한 것이 있는가?/ 냉혹한 패배, 소득, 변화/ 그것은 경쟁인가 결합인가-싸움인가 어울림인가/ 밤의 승자는 아침이면 패자가 되고/ 언제나 패배를 향해 나아가는데 결국은 승리하며/ 그러고는 패배한다.’
시노트 신부가 죽기 한 달 전 가을날 오후에 쓴 시의 일부다.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줬듯 억울하고 짓눌린 이들의 싸움은 패배하더라도 결국은 승리하는 것이라는, 아니 패배하는 순간에조차 승리하는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그의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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