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자기가 문닫아 걸었다 해서 남이 길 나서는 것을 미워하고, 자기가 술을 끊었다하여 남이 많이 마시는 것을 괴이타 하며, 자신이 채식을 한다 해서 남이 고기 먹는 것을 근심하고, 자기가 세상 일에 관심이 없다하여 남이 그 사이에 있음을 혐오하며, 자기가 청렴하다 하여 남의 탐욕스러움을 욕한다. 이는 가슴 속이 드넓지 못한 때문이다.


명나라 주국정(朱國禎, 1557-1632)의 《자술(自述)》에서


17세기 사람이 마치 요즘 우리를 보며 말한 것처럼 문제 지적이 정확하다.

우선, 두문(杜門)에 대한 의문부터 짚고가자. 오래 전 읽은 어느 위인전은,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을 황희 스토리와 연결시켰다. 즉 고려가 망하자 많은 충신들은 두 왕조를 모실 수 없다는 이유로 두문동에 들어가서는 절대 나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문불출이란 말이 생겼다고 그 위인전은 말했다.


그런데 이성계 정권에서 이 동네에 심부름꾼을 보냈다.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너희들이 그 동네에 칩거하는 충정은 충분히 알겠노라. 하지만 나도 새 왕조를 꾸려가야 하니, 몇 명은 빼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너희들도 명분을 살릴 수 있고, 나도 내 일을 할 수 있으니, 해롭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 마을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보장 못한다. " 이에 두문동 사람들은 모여 회의를 했다. "왕을 갈아치우는 완력정치가가 이 마을 하나쯤 쓸어버리는 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중에서 고려왕조에서 아직 크게 녹을 받아먹지 않은 똑똑한 젊은 친구를 내보내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개문이출(開門而出)한 것이 바로 젊은 황희였다. 이 사람은 조선왕조에서 능력을 발휘해서 역사적으로도 존경받게 된다. 그런데 명나라 주국정이 우리나라 14세기의 일을 알고 있었던가. 그 고사를 인용해서 저 말을 했을까. 그랬다고 보는 건 좀 무리하다 싶다. 그렇다면 저 위인전의 두문불출 고사는 어떻게 된 일인가. 헷갈린다. 두문(杜門)은 의미가 "문을 닫아걸다"라는 뜻이니, 고려 신하들이 그곳에 폐칩하면서 이 동네를 두문동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두문불출이란 말은 그 전에도 있었던 말인데, 그 말을 빌려와 신하들의 굳은 마음을 표현하는데 썼을 거라고 추측하는 게 합리적이다. 따라서 위인전이 이 말의 '출처'라고 말한 대목은 섣부른 짐작이 아닐까 싶다.


주국정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감정을 섞어 대하는 것은 마음이 좁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사람들 가슴이 너무 좁기 때문에 그 차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란 얘기다. 일견 옳은 얘기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의 가슴을 확장하라고 권장하는 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주국정의 논리를, 그의 글에 적용시킨다면 기묘한 모순이 발생한다. 즉 주국정이 마음이 좁은 사람을 비판하는 것도, 마음 넓은 그가, 그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는 행위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기와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사회 이성'의 수준에서 다뤄지는 것이 문제를 선명하게 한다.


나와 정치적 노선이 다른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 것. 즉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이 욕을 하는 행위는 바로 저 '다름에 대한 내성(耐性)'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가 새누리를 지지할 수 있듯, 다른 사람은 새정치를 지지할 수도 있다는 걸 흔쾌히 인정할 수 있어야, 그 사회가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 누가 일본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하면 맞아죽게되고 미국에 대해 저런 얘기를 하면 사대주의로 몰리게 되는 건, 사회이성이 아직 미비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견해 발표와 소신있는 행동이 한 사회의 '원칙'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그 차이를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폭언이나 완력으로 차이를 해소하려고 하는 억지를 써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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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국정의 <좁은 마음>은 사회가 개인을 옥죄는 전체주의적 강박이다. 우리 사회가 서둘러 갖춰야할 건 개방적 정신이다. 상대가 나와 달리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그가 곧 나의 적이 되지 않는 사회가 바로 개방적 정신의 사회이다. 차이가 공존하면서 더욱 풍성한 토론이 가능한 사회가 바로, <넓은 가슴>의 사회이다. 준렬한 비판이나 한치 타협없는 자기주장은 필요하되, 그것이 상대방을 섬멸하고 일망타진하는 전쟁이어선 안된다. 그렇다면 자기도 늘 섬멸될 위험에 처해있어야 한다. 토론은 차이를 발견하고 그것에서 문제의 진실된 지점을 찾아나가는 이성행위이다.


누가 자기와 수 틀리는 말을 하면 와르르 달려들어 폭언의 뭇매를 남기는 네티즌사회의 이상한 정치과열도, 기계환경은 이미 자유사회의 수준을 갖췄는데, 정신환경, 혹은 사회환경이 아직도 집단적 완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회의 공기 속에 흔쾌한 포용의 정신과 차이를 감내하는 공존의 원칙들이 존재해야 제대로 이성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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