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화가, 이호중을 추억함
5주기에 돌아보는 그 고독한 풍경…어디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호중은 안개와 수로를 잘 그린 화가다. 안개 속에 흐드러진 들꽃과 고요히 흐르는 물길을 이호중보다 잘 그린 화가를 보지 못했다. 뛰어난 스케치 실력과 예민한 감성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을 들고 전국을 헤매던 그가 어느 날 안개와 수로를 떠나 황토를 찾아 나섰다. 남도의 산하를 누비며, 황토와 거기 움튼 사람의 흔적을 찾아냈다. 나는 그의 안개와 수로에 반했듯 그의 황토에 반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싶어 서울 세검정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자주 갔다. 그날도 보고 싶은 그림이 있어 화실을 찾았다. 이호중이 2008년에 그린 '소나무와 황토'였다. 페인트 빛 바래가는 농가의 낮은 지붕을 굽어보듯 소나무 몇 그루가 줄지어 섰다. 주변은 황토의 대지. 기울어가는 오후 햇살에 농가의 남쪽 벽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바야흐로 기울어가는 햇살로 인해 빛이 흘러넘치고 있다. 흘러넘치는 그 오후의 햇빛이 그리웠다.
그가 물었다. "그 그림이 좋아?" 나는 "저 벽에 기대서서 햇볕을 쬐면 행복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저 그림은 당신이 제일 잘 아는군"이라고 했다. 표정이 어두웠다. 그러더니 불쑥 뱉었다. "가져가." 하지만 그 그림은 곧 팔렸다. 대신 이호중은 그림이 인쇄된 엽서를 한 장 주었다. 원화가 지닌 절묘한 빛과 색을 엽서에서 보긴 어렵지만 팔려 버린 그림을 추억하기에는 충분했다. 엽서는 내 서재에 있다.
나는 이호중을 1985년 대학로에 있는 '샘터사'에서 처음 만났다. 샘터사는 동화작가 정채봉이 편집부장을 맡아 펴내는 '월간 샘터'로 유명했다. 소설가 정찬주가 출판부를 맡아 동화 시리즈를 낼 때 이호중은 삽화를 그렸다. 정찬주는 "최쌍중 화백이 소개한 사람인데, '천재 끼'가 있어"라며 샘터사 건물에 딸린 카페 '밀다원'에서 그를 소개했다. 잘 생긴 얼굴에 언뜻 냉소가 비쳤다. 이호중은 천재 끼가 아니라 천재성이 있는 화가였다. 그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일류 화가가 됐다.
이호중과의 인연은 점선으로 이어졌다. 그는 도깨비처럼 출몰했다. 오래 모습을 감췄다가 잊을 만하면 불쑥 나타났다. 유럽을 여행하거나 지방에 가서 '살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1993년에는 주변과 연락을 완전히 끊고 사라져 버렸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학위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을 그가 돌아온 뒤에 알았다. 그는 어렵게 공부한 듯했다. 1995년쯤 잠시 서울에 돌아와 지인들을 만나며 학비를 마련했는데, 정찬주가 한 달 치 월급을 털어 그의 손에 쥐어 보낸 사실도 나중에 듣고 알았다.
이호중이 남도의 전원 속으로 들어간 시기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였다. 그는 속살 같은 황토를 그렸다. 살점이 쥐일 듯, 손가락 사이로 살며시 흘러내릴 듯한 그런 황토였다. 거기 사람의 집이 깃들였다. 황토에 사로잡힌 뒤 그가 그린 안개와 수로는 매력을 잃었다. 나는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가 늙어서 그린 몽마르트르를 생각했다.
일기를 들추어 본다. 2010년 10월 15일. 그 날 이호중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는 4호나 될까 싶은 작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을 몇 점 보였다. 직선 몇 개로 정리한 정물과 풍경이었다. 원색을 아낌없이 사용해 그렸다. 구도는 단순해지고, 선과 색이 분명해져가고 있었다. 안개는 말끔하게 걷혀 버리고 없었다. 이호중은 그가 그린 옛 그림에 연연하는 나에게 말했다.
"나이를 먹어서도 젊은이의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나는 변했다. 나이를 먹었고, 따라서 시력도 떨어지고 색감도 전과 같지 않다. 내 눈이 받아들이는 것, 내 눈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 내가 변한다면,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는 "사인을 안 하면 아무도 내가 그린 줄 모를 거다"라며 낄낄거렸다. 나는 차가운 송곳에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호중의 풍경 속에는 사람이 없다. 안개 속에도, 황토 위에도. 새로운 그림 속에도. 목 줄기가 타들어가는 듯한 그의 고독이 못 박혀 있을 뿐. 그래서 그토록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모른다. '소나무와 황토' 속, 내가 기대 쉬고 싶었던 흙담의 따끈한 온기는 고독했지만 사랑으로 충만했던 이호중의 체온일 것이다.
이호중은 2010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쉰세 살. 화실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지 20일 만이었다. 나의 휴대전화에는 잇따라 메시지가 들이닥쳤다. "11/14 08:25 AM 작가 이호중 간암 투병중. 위중함. 신촌세브란스 1758호-후배 김XX", "11/14 12:11 PM 호중형 방금 사망하셨습니다", "11/14 01:39 PM 4호실입니다. 발인은 화요일 벽제입니다." 나는 병문안하러 가던 길에 버스 안에서 메시지를 받았다. 곧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죽기 전 이호중은 여러 작품을 동시에 작업했다. 그의 형인 이희중 용인대 회화학과 교수는 장례식장에서 나를 만났을 때 "그 많은 작품들이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유가족이 수습한 그림 중 상당수는 그리다 만 것들이다. 당시 이 교수는 "지인들이 추모전을 연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추모전이 열린 적은 없다.
이호중이 떠난 지 5년이 지났다. 세상은 이호중을 잊은 것 같다. 세검정 화실 문에 붙었던 문패도 떨어졌다. 화실이 있던 낡은 건물은 새로 지어 옛 모습을 잃었다. 그의 작품은 세상 속으로 흩어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희중 교수는 동생의 작품이 경매에 나올 때마다 가격 불문하고 사들인다. 열 점 남짓 모였다. 이 글을 쓴 이유는 잊힌 천재 화가의 흔적이나마 그가 없는 세상 어딘가에 남겨 두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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