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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버나드 쇼는 그런 묘비명을 안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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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턴'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70대 연세에도 현역으로 일하시는 함정훈 기자는 어느 술자리에서 "평생 제목을 다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던 편집기자라면, 자신의 묘비명에 무엇을 쓸지 고민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과 그 생을 통한 깨달음을, 한마디로 뭐라 할 것인가. 편집쟁이 삶을 누리다 죽은 자로서 산 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절절한 헤드라인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아직도 내 제목을 달지 못했다"고 말할 심산인지 "제목을 달다가 제 목이 달아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달 건지.

묘비에 새겨진 문구로, 익살과 재기를 과시한 사람 중엔 아일랜드 출신의 노벨문학상 작가, 버나드 쇼(1856~1950년)가 손꼽힌다. 그가 직접 주문한 비명(碑銘)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번역문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린 시절 읽었던 명언집에도 있었던 것 같다. 1984년 대언론인 김중배의 세평(世評) 칼럼 '그게 이렇지요('권력자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나갔다)'에도 그런 표현이 보인다.
묘지에 쓰인 영어 원문은 이렇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물쭈물하다'라는 번역은 stay around에서 나온 것 같다. 이 말은 어느 곳의 부근을 어슬렁거리며 멀리 떠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평생 말솜씨로 먹고산 작가의 고도로 계산된 위트가 있는 문장이니만큼 대충 해석해서 묘미를 즐기려고 하는 것은 맹인모상(盲人摸象)에 가깝다. 저 문장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와 같은 우리식의 구어체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다. 문제는 이 오역이 버나드 쇼의 대표적인 입담처럼 우리나라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직역을 하면 이렇다. "내가 비록 충분히 오래 어슬렁거렸다 하더라도,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줄 나는 알았다." if를 even if로 읽으면 그렇다는 얘기다. 버나드 쇼는 95세까지 장수한 사람이다. 이 세상을 얼쩡거리며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결국엔 이와 같은 일(죽음)이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 작가가 우스개로 집어넣은 말의 핵심은 something like this에 있다. 죽음을 '이 따위 것'이라 표현한 것이다.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죽음은 느닷없이 닥치며 동의 없이 찾아온다. "내가 비록 (이 지상에) 꽤 오래 머물긴 했지만 이 따위 것이 결국엔 닥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정도의 유머다.

인생을 우물쭈물하며 산 것이 포인트가 아니며. '이럴 줄 알았다'는 방식의 후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 앞에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써놓은 것일 뿐이다. 오역에서 교훈을 얻으며, 섣부른 깨달음을 전파하지 않는 게 우스꽝스러운 언어오염을 줄이는 길이 아닐지.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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