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마지막까지 '시인의 말'을 남기고자 했던 원로시인 홍윤숙 별세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세상은 / 썰수록 커 가는 / 부재의 둥근 사과 / 이가 시린 사과 속에 / 손을 담그면 / 멎었던 일상의 시계 소리도 / 여울져 오고'.


잊고 지내기 쉬운 존재에 대한 향수. 시인 홍윤숙은 인생론적 모럴에 안주하지 않았다. 깊은 관심과 배려로 마중을 나가 부재의식을 이기고 나아가 자아를 발견했다. 그 고귀한 관념의 트레이닝을 더는 엿볼 수 없다. 12일 오전 10시3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1925년 8월 19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과를 다닌 고인은 1948년 '예술평론'과 '신천지'를 통해 등단했다. 1962년 '여사(麗史)시집'을 시작으로 '타관의 햇살(1974년)', '낙법 놀이(1994년)', '쓸쓸함을 위하여(2010년)', '그 소식(2012년)' 등을 출간하며 무려 반세기를 현역으로 활동했다. '자유, 그리고 순간의 지상(1972)', '해질녘 한시간(1980)',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고독을 노래한다(1996)', '예술가의 이야기가 있는 방(2004)' 등 수필집도 아홉 권을 냈다.


희곡, 평론까지 아우른 그의 작품세계는 순수세계를 정서적으로 탐구하다가 점점 모순과 어둠으로 가득 찬 현실적인 삶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로 확대됐다. 고인은 이 과정을 통해 애상과 자학 혹은 비애와 탄식의 태도를 보였다. 후기에는 체념과 정관 혹은 초월과 관조의 자세를 드러내기도 했다. 등단 전 태양신문사 문화부 기자 등으로 활동해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한국가톨릭 문우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시단에서 존재감을 넓혔고, 1990년에는 예술 발전에 현저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인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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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노년이 돼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2006년부터 3년여 동안 세 번의 수술과 크고 작은 질환으로 투병생활을 했지만 2012년 시집 '그 소식'으로 제4회 구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2009년 '시인세계' 겨울호에서 "공황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돌보지 못하고 버려져 있는 글 조각들이었다. 그것들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을 다지고 일어나 앉았다"고 했다. 생애 마지막 시집이 된 '그 소식'의 '시인의 말'에서는 "내 생애의 마지막 시집에 할 말은/ 다가올 죽음 앞에 당당하고 의연하게/ 마주 설 것이다/ 그것뿐이다"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유족으로는 장남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 차녀 양지혜 전 오하이오 오토바인대 화학과 교수, 3녀 양주혜 화가, 사위 짐 라시먼 오하이오주립대 화학공학과 교수ㆍ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ㆍ박재희 전 올림푸스호텔 이사 등이 있으며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호실(☎02-3410-6902)이다. 14일 오전 9시 청담동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한다. 장지는 용인시 천주교서울대교구 공원묘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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