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조원의 거대 시장, 자산운용업의 속사정 탐구 ③

운용사 고유의 투자철학, 원칙 세우고 경영 임기 보장 필요
신규 운용사 진입장벽 낮추고 경쟁력 상실한 운용사는 적극 퇴출해야


[아시아경제 권해영 기자] "최고경영자(CEO)가 1~2년에 한번씩 바뀌는 회사에 과연 투자 철학과 원칙이란 게 있을까요. 투자자보다 경영진의 이익, 장기보다 단기성과에 급급한 현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자산운용업의 발전은 요원한 일입니다."(국내 모 자산운용사 대표)

국내 자산운용업계가 좀체 부진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2007년말 116조원이었던 주식형펀드 시장은 8년이 지난 올해 9월 79조원으로 되레 줄었다. 전문가들은 국내 자산운용업계가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차별화된 투자 철학과 원칙, 이를 꾸준히 지켜나가는 실행력과 일관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ㆍ부사장)는 "운용사들이 4~5년 전엔 차ㆍ화ㆍ정(자동차ㆍ화학ㆍ정유), 지난해엔 가치주, 올해는 중소형주 펀드를 우르르 팔고 있다"며 "공산품 찍어내듯 유행에 따라 똑같은 펀드를 찍어낼 게 아니라 자신만의 투자 철학, 원칙을 세워 펀드를 운용하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87곳 운용사가 모두 고유한 '색깔'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각 운용사가 가장 자신있는 투자 전략에 집중해 업계가 좌판을 넓게 깔아주면 투자자는 다양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돈을 맡긴 투자자가 돈을 벌고 신뢰를 쌓게 되면 운용업계 발전이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일본 최초 독립계 운용사인 사와카미 투자신탁은 좋은 벤치마킹 사례다. 1999년 설립된 이 회사는 '장기투자를 통한 회사원의 자산 증대'를 모토로 한다. 기업가치보다 싼 주식을 사서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때 파는 가치투자 철학을 세우고 개인의 자금만 받아 운용한다. 운용 펀드도 '사와카미 펀드' 1개다. 설립 후 몇 년간은 적자였지만 가치투자 원칙에 충실한 결과 연 5~10%의 수익률을 꾸준히 내고 있고 지금은 사와카미 펀드를 일본 2위 규모의 단일펀드로 키워냈다.


문제는 지배구조다. 오너가 있는 일부 독립계 운용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운용사는 금융 지주사 계열이어서 1~2년 단위로 CEO가 바뀐다. 경영진이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투자 철학과 운용 독립성을 지켜나가기 어렵다. 책임운용 강화가 대안으로 거론되는 이유다.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경영진과 운용역이 투자 철학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근무연수를 충분히 확보해줘야 한다"며 "장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경영진과 운용역의 임기를 특정하지 않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자산운용사 CIO는 "CEO와 CIO가 자주 바뀌면 철학이 바뀌고 기존에 믿고 돈을 맡긴 투자자들은 달라진 투자 철학에 혼선을 빚게 된다"며 "경영진에 대한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 제공 등 책임운용을 강화할 수 있는 내부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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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이 운용사 진입 및 퇴출을 유연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영업인가 후 6개월 안에 영업 실적을 올리지 못하거나 최저자기자본 요건 대비 자기자본이 70%를 밑도는 경우 인가 또는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금융당국은 운용사 인가는 해외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은 잣대를 들이댄 반면 운용사 퇴출에는 소극적이었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경쟁력을 상실한 운용사는 업계에서 퇴출하고 자격을 갖춘 회사는 적극적으로 편입해 운용업계에 고인 물을 빼내야 한다"며 "운용사 진입과 퇴출이 유연해지면 시장의 긴장감이 조성되고 운용사 간 생존경쟁이 치열해져 국내 운용업계가 한단계 레벨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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