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책과 저자] 박성원 소설집 '고백'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
'1969년 한 해에 미국 여성들이 핫팬츠 구입에 쓴 돈만 100만 달러가 넘었대. 1969년은 그런 해이고 그 기운을 받아 나는 태어났어. 인류가 달을 밟았고 한쪽에선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고 있었지.'
100만 달러는 2015년 현재 '네이버' 환율로 약 11억8190만 원이다. 서울 평창동에 있는 꽤 괜찮은 단독주택을 살 수 있다. 1969년이라면 더 엄청난 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100만 달러는 상징이다. 권투선수 켄 노턴은 1973년 3월 31일 샌디에이고에서 무하마드 알리의 턱뼈를 부수고 나서 '100만 불 복서'가 됐다.
핫팬츠의 기운, 100만 달러어치 핫팬츠의 기운. 핫팬츠를 입은 여성의 골반은 벗었을 때보다 더 섹시하다. 핫팬츠가 누드를 이긴다. 그런 기운? 인류가 달을 밟았다는 시대는 그 만큼 어두운 시대였으리라. 그런 시대, 그런 기운.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는 시대는 푸른 하늘을 네이팜탄(Napalm bomb)이 쉼 없이 날고 죽음에 익숙한 시대이다.
아, 1969년에 우드스톡 페스티벌(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이 열렸다. 여기서 지미 헨드릭스가 미국 국가(The Star Spangled Banner)를 연주한다. 미국음악 전문가 박진열은 이렇게 썼다. "총성과 네이팜탄의 굉음을 짓이겨 처절하게 난도질 친 기타 선율은 베트남전의 광기 아래 스러져간 젊음에 대한 애도와 기성세대에 대한 야유로 타올랐다."
박성원(46)의 소설집 '고백'에 실린 표제작품 18쪽 밑에서부터 넷째 줄에 시작되는 1969년은 아주 시크한 척하지만 사실은 '생양아치' 같은 '나'가 태어난 해다. 작품 속의 '나'는 갓 등단한 소설가. 한 달 중에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여자와 자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그런 놈이었다. '나'는 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쓴다.
친구는 '소설은 고백'이라며 말한다. "너는 신부님도 울릴 수 있잖아."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10월의 아침 공기다'로 시작해서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로 끝나는 소설을 쓰고, 그 작품으로 등단한다. '나는 10월의 아침 공기를 좋아한다'고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문장은 번역 투다. 일부러 그렇게 썼을지 모른다.
'나'는 상당히 수상하다.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나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멱살을 잡은 다음 묻고 싶다. "너… 박성원이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에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려는 듯 진짜 '박성원'이 등장한다. 자기가 쓴 소설에! 그러니까 진짜는 아니고, '나'와 흡사할 성 싶은 박성원이다. 소설가는 작품의 꼬리 부분에 '리본'을 달았다.
'"박성원은?" "응? 여기 있잖…"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찾기 시작했어. 그러나 그는 J의 말처럼 정말 없더군. "조금 전에 아내와 통화하는 것 같더니 집으로 도망간 모양이야."(중략) 난… 물었어. 이봐, 대체 저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라고. 그러자 박성원이 말했어. 글쎄, 하고 말이야.'
'박성원'은 '고백' 뒤에 나오는 '더러운 네 인생'에도 등장한다. 이번에도 소설가다. '나'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요양원을 방문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단골 술집에서 '박성원'과 술을 마시는 여자 K를 만난다. '나'는 K를 보자마자 몸이 달아오른다. 그런데 K와 헤어진 뒤 '박성원'은 그녀가 '별로'라고 한다.
소설가 박성원은 여러 번 복화술을 써서 독자를 골탕 먹인다. 그의 복화술은 작품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가령 '현대문학' 9월호에 실린 대담. 그는 표절에 대해 말한다. 진행자인 이기호가 "문장이 동일하다는 것 말고, (중략) 아이디어와 구상을 갖고 왔지 않느냐, 그래서 표절이다…"라고 물은 데 대한 답이다. 그는 김승옥의 '다산성'을 예로 들어 말한다.
"순진한 숙이 씨 앞에서는, '숙이 씨, 니체를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그 속생각이 나오는데, (중략) '저년을 당장이라도 풀밭으로 끌고 가 덮치고 싶다' '저년 턱주가리가 키스를 잘하게 생겼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박성원은 그러면서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이 쓴 '플랫폼'을 끄집어내 주인공이 여성들에게 "아침에 미장원 다녀오셨네요. 좋은 냄새가 나네요" 하지만 속으로는 "저년 저거 당장에라도…"라고 하며, 심지어 비슷한 문장이 나올 정도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김승옥은 우엘벡을 표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의 말이 장황한 이유는 고민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현대문학'과 대담을 시작하는 부분에서 그의 태도는 이렇다. "매번 그렇지만 저는 소설을 쓰면 보내고 나서 내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것." "왜 안 읽으세요?" "부끄러워서요." (중략) "'작가의 말'을 안 쓰는 것도 그런 연유인가요?" "그렇죠."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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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성원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나 1994년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단편소설 '유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 '나를 훔쳐라', '우리는 달려간다' 등 소설집을 냈다. '고백'은 박성원의 여섯 번째 소설집이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한무숙문학상'을 받았다. 직업은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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