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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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의 실상을 기사로 알리는 사람들을 종군기자라고 부른다. 최초의 종군기자는 '종군기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타임스'의 윌리엄 하워드 러셀이다. 러셀은1853년 크리미아 전쟁을 취재하며 전쟁의 참상과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크리미아 전쟁을 보며 "영국 여왕 폐화의 기병부대가 군도를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격했고 30분만에 적을 괴멸시켰다. 하지만 측면 언덕에 매복한 적이 집중사격을 가한 탓에 죽거나 죽어가는 병사만 남았을 뿐 적과 마주선 영국군은 한 명도 없었다"라고 기사를 썼다. 이 기사를 본 나이팅게일은 현장으로 달려가 적군과 아군 가리지 않고 부상병을 돌봤고, 전후 적십자 설립으로 이어졌다.

종군기자의 역할은 종전을 앞당기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을 취재한 종군기자는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마을에서 어린 소녀가 벌거숭이로 내달리며 울부짖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미국의 반전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종전을 앞당겼다. 종군기자 경험을 문학적 자산으로 승화시킨 유명 작가도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헤밍웨이는 1937년 스페인내전 때의 종군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불후의 명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지필했다. 전설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따 생사를 돌보지 않는 기자정신을 일컫는 '카파이즘'이란 단어도 생겼다. 짧은 생애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전쟁터를 누빈 카파는 1954년 베트남 독립전쟁 취재 도중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6ㆍ25전쟁을 취재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도 있다. 마르그리트 히긴스다. 도쿄 특파원이었던 하긴스는 1950년 6월25일에 북한의 침공소식을 접한다. 도쿄에 부임한지 엿새 만에 그녀는 김포공항에 도착해 현장 곳곳을 누비고 태평양지역 미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와 인연도 맺는다. 이 인연으로 하긴스는 맥아더 원수를 취재하며 "트루만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을 파견해주도록 건의할 생각"이라는 특종도 낚는다.

그는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 활약상을 전하며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고 극찬했다. 해병대가 '귀신 잡는 해병'이 된 것은 순전히 그의 공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국전쟁(War in Korea)'이란 책을 펴내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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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종군기자들도 많다. 김성호 전 광운대 교수는 '한국 방송기자 통사' 저서에는 최초의 종군 방송기자인 한영섭씨를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한 기자는 1949년 국방부 출입기자로 발탁됐고 1950년 육군사관학교에서 병사들로부터 실전에 가까운 종군기자 훈련을 2주 동안 받기도 했다.


얼마전 6ㆍ25 전쟁 참전 언론인 35명과 종군기자 43명 등 78명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국방부 신청사 브리핑실에 걸렸다. 작년에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바 있지만 국방부 청사내에 명패가 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6ㆍ25전쟁 65년을 맞은 종군기자로 참전해 우리의 자유와 평화 수호에 기여한 언론인을 예우하며 감사함을 전하자는 취지다. 늦었지만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국방부 출입기자인 필자는 명패를 볼때마다 다시는 전쟁이 발발하지 않고 목숨을 잃는 종군기자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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