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이 박사는 25살의 나이에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부터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연구기관인 페르미 국립가속기 연구소에서 입자물리학 연구팀을 이끌었다.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 입자와도 인연이 깊다. 그는 1972년 '힉스 입자에 미치는 강력(강한 핵력)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국제학회에서 발표하면서 피터 힉스 박사의 이름을 따 처음으로 가상의 이 입자를 '힉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이 박사는 개발도상국, 특히 군사독재 체제의 국가가 핵무기 개발을 하는데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한국에 와서 학술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도 박정희 정권의 군사독채를 이유로 거절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공개된 이 박사의 편지에는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해온 하계 대학원 행사를 재고합니다. 하계 대학원의 책임을 맡는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걱정됩니다.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또 이 박사는 소립자 물리학자로 핵무기 개발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게 물리학계의 정설이다. 이 박사의 죽음도 당시 사고 경위를 따졌을 때 의문사 가능성은 없었다고 하며 유가족들도 단순한 사고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이 박사의 유족들이 소설 내용에 강하게 반발해 출판금지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로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명예훼손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소설이 허위임은 인정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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