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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샘]말라비틀어진 수련꽃이 詩가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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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비틀어진 수련잎사귀 속에 누가 잠들어있나/파문의 시작은 남루한 외투 한 자락 끌고 와/뜨거운 몸을 덮어주면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얼굴로 우리는 헤어졌고/헤어진 사람은 과거의 얼굴 과거의 가슴일 뿐
바닥에 엎드린 무채색 핏덩이 속에 누가 잠들어있나/파문의 끝을 보려고 흰 빛에서 검은 빛까지 혼자 도착한 저 몸뚱어리를 누가 가져가시나
흑백 외투 한 장 펄럭펄럭 날아오른다

수면을 솟구쳐 오르는 부랑자의 꽃 한 송이를 받아야 할 때/내 심장은 얼마만큼 슬픔의 깊이를 파내려가야 하나/별 없이 곡괭이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지려는 사람/장엄한 울음의 절차 없이 그가 녹아내리고 있다/나는 두 손을 저녁의 몸 속으로 푹 찔러 넣어본다

-박서영의 '흑백 수련'

이 놀라운 시를 소리 내서 여러 번 읽는다. 붉은 제빛을 잃고 잎사귀 속으로 들어간 검추레한 수련꽃의 종말을 이토록 뜨겁게 들여다본 사람이 또 있었을까.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절정의 연애가 시들어, 이제 타버린 심장의 너울 몇 개만 남은 흑백 수련을 박서영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불타는 눈으로 끄집어낸다.

바닥에 엎드린 무채색 핏덩이, 파문의 끝을 보려고 흰 빛에서 검은 빛까지 혼자 도착한 몸뚱어리. 흑백 외투 한 장. 사랑이란 것의 나중 모양새가 이렇지 않던가. 요염하고 달콤하고 아름답던 것을 털어내고 난 다음, 격정의 한 시절을 환멸과 분노와 무심이 훑어내고 난 다음, 우린 마침내 사랑의 저 얼굴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나는 나를 피웠던 수련의 흑백 시체들을 가득 몸속에 담아 놓고 있는 자가 아니던가.

검은 꽃주검을 보며, 시인은 스스로를 받아내듯 그 부랑자를 받아내려 한다. 수면 위에 돋아오른 검은 꽃의 아래에는 잴 수 없는 슬픔의 심연이 있다. 저 꽃을 받아내기 위해선 내가 물속으로 들어가 앉아 팔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더 있겠는가. 별도 없는 밤 그를 파묻을 곡괭이도 없는 심장 속에서 장엄한 울음도 없이 그를 소멸시키고 있다.

죽은 꽃의 시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를 받아내기 위해 푹 찔러본다. 오오, 경계의 인식과 넘나듬이 마치 내가 겪은 듯 충격적으로 생생하다. 흑백 수련은 그냥 흑백 수련이 아니다. 전존재의 어제이며 내일이다.

빈섬 이상국(시인ㆍ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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