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달밤·동물이 빚은 환상적 기운…'고궁보월'展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서 사석원 개인전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서울 도심에 자리한 고즈넉한 고궁. 그리고 달밤. 이곳에 깃들인 부엉이와 사슴, 토끼, 호랑이, 사자. 동양 붓으로 유화물감을 묻혀 거대한 캔버스 위에 두텁게 그려낸 그림들 속에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기운이 가득하다. 과거 민화 속에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사실적으로 묘사된 동물들의 표정에서 마치 감춰진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다.
지난 2010년 '서울연가' 시리즈를 통해 서울 토박이로서 경험한 서울 곳곳의 추억과 사람 이야기를 그림으로 선보였던 사석원 작가(55). 그가 3년 반에 걸친 공백을 깨고 전시를 열었다. 수백 년 전 그 곳을 걸었을 왕들의 자취를 따라, 자신의 마음 속에 담긴 고궁의 아취(雅趣)를 화폭에 그려냈다. '고궁보월'(古宮步月)전이다. 달밤은 어둡고 수동적인 밤이 아닌, 동양에서 현실을 벗어난 우아한 사유와 풍류의 차원을 상징한다.
그는 "궁을 비추는 달처럼 궁 안 풍경을 은근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싶었다"며 "거리에 있는 CCTV 속의 영상은 범죄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런데 만약 하늘에 떠있는 달이 초고화질로 세상의 모든 구석구석까지 보고 있었고 또 본 것을 저장하고 있었다면 달은 역사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만능열쇠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림 40여 점 속엔 뿔을 치켜세우고 정면을 응시하는 수사슴과 도발할 듯 화려한 색채의 부엉이들, 매서운 눈빛을 발하는 호랑이, 하늘을 휘어감을 듯한 용 등이 나온다. 동물들은 왕실의 인물을 상징한다. 특히 작가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 그리고 정조의 포부를 따라 근대화를 꿈꾼 고종에 주목했다. 그는 "정조는 알면 알수록 대단한 왕이란 생각이 든다. 고종은 흔히 우유부단하고 약한 왕으로 인식되는데, 사실 나라의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많은 노력을 했었다고 본다"고 했다.
강렬한 원색과 힘 있는 붓놀림, 거친 질감은 캔버스 위에 600년 조선왕조사의 위엄과 번영, 쇠락하는 왕조의 운명, 그리고 한 나라의 군주인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갖는 외로움 등의 감정, 좌절과 슬픔이 섞인 옛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담아냈다. 물감을 미리 섞지 않고, 직접 캔버스 위에서 혼합해 바른, 밝고 화려한 색채는 민예적이면서도 궁궐의 기둥과 천장을 화려하게 수놓는 단청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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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 기법에 서양 재료. 작가 특유의 그림 방식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동양 붓을 써본 사람만이 몸에 익은 기법이 있다. 나는 동양화가로 불리길 바란다. 동양화 기법으로 서양 재료를 써서 동물을 통해 그 무엇을 조형화하는 것. 여생을 여기에 목매달고자 한다"며 "화가로서 지금 내 나이가 아주 좋은 나이다. 이 항구적 과제에 깊이를 집어넣기에 말이다. 궁궐을 그리면서 한국적인 미에 대해 눈을 뜬 셈이다. 여러 실험을 해본 조형적 측면에서도 내 재산이 부쩍 불어난 기분"이라고 했다.
7월 12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 02-7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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