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WTO 체제는 여기에서 성장을 멈췄다. WTO 체제 출범 이후 중국, 인도 등 신흥국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갈등이 커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한 나라가 바로 한국. 2004년 한ㆍ칠레 FTA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50여개국과 15개의 FTA를 맺었다. 그러나 양자 간 FTA는 조만간 한계를 드러낼 전망이다. FTA가 세계도처에서 확산되면서 별다른 차별적 이익을 누리기 어려워지자 전 세계가 다자간 FTA 시대에 본격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메가 FTA다. 바야흐로 전 세계 도처에서 지역경제 블록인 메가 FTA가 생겨나면서 세계시장은 지역 중심의 거대 경제 블록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추세다.
우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미국과 일본의 주도로 12개국이 참여하는 경제협정으로 참여국들의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치면 세계 GDP의 37%나 된다. 원래 미국의 중국 포위전략으로 시작됐지만 앞으론 메가 FTA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TPP를 통해 주도권을 회복하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도하라운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역질서로 발전시켜 주도권을 회복한다는 구상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TPP와 중국이 주도하는 RCEP와 FTAAP가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지역경제블록이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 최강국인 미국과 미래의 최강국 중국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 이는 지난 3월 말 보하오 포럼에서 중국의 시진핑 국가 주석은 일대일로(一帶一路)의 개념을 골자로 한 아시아 운명 공동체를 건설하겠다고 나서면서 공식화됐다.
이를 위해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AIIB)를 설립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나왔다. 중국이 금융은 AIIB, 무역은 FTAAP와 RCEP를 거느림으로써 미국이 금융은 IMF, 무역은 GATT와 WTO를 거느리는 체제를 본 따 미래 중국의 체제를 구축한 셈이다. 미국의 견제에도 동남아는 물론 유럽국가들마저 중국주도의 AIIB 가입을 선언함으로써 중국의 리더십을 받아들였다. 이에 맞서 미국은 올해안으로 TPP 타결을 서두르는 두 강대국 간의 힘겨루기는 격렬해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블록경제하의 세계는 전쟁 등 대부분 좋지 않은 결말을 남겼다는 점이 편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는 것 같다. 특히 강대국 사이의 힘의 균형이 바뀔 때마다 그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으로선 무역질서의 변화에 대해 느끼는 강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무역에 의존해 살아가야 할 한국으로선 자유무역의 확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것만이 불필요한 오해도 사지 않는 길이자, 생존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최성범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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