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통역가, 사실 검증 전문가, 녹음기사 등 우리 사회의 인비저블들의 이야기

인비저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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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다른 유수의 매체처럼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도 '사실 검증 부서'가 있다. 이름 그대로 기자들이 쓴 기사의 사실 여부를 일일이 확인 작업을 하는 부서다. 익명의 CIA 제보자에게 전달받은 내용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영화평에서 "DNA가 포함된 염색체가 물속에 가라 앉는다"는 표현이 맞는 말인지 확인하는 식이다. 이 '사실 검증 전문가(Fact-checker)'들의 활약으로 기사는 정확성과 신뢰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부서에서 일하려면 웬만한 석학 수준의 치밀함과 꼼꼼함을 갖춰야 한다. '뉴요커'에서 근무하는 16명의 '사실 검증 전문가'들의 절반 이상은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 제2외국어에 능통하며, 대다수가 석사 이상의 학위를 소지한 인재들이다. 하지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알지 못하듯, 독자들은 이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필자 소개란을 비롯해 잡지의 어디에도 이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경우는 뭔가 잘못됐을 때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인정과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도, 이들은 묵묵히 무대 뒤편에 서는 것을 선호한다.

저자 데이비드 즈와이그는 자신이 언론사에서 '사실 검증 전문가'로 활약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 책을 펴냈다. 우선 일을 잘할수록 자신의 존재는 더욱 더 보이지 않게 되는 아이러니가 흥미로웠다. 이 같은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일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 역시 독특하게 다가왔다. 이때의 경험으로 저자는 '자기 피알(PR), 자기 브랜드 시대'를 조용히 역행하는 다른 동지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남들의 관심이나 칭찬이 아닌 일 자체에서 깊은 만족감을 느끼는 이들을 그는 '인비저블(invisibles)'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마치 숨바꼭질하듯 사회 곳곳의 '인비저블'들을 찾아다니며 취재에 나섰다. 배우·정치인·스포츠 선수 등 유명인들의 책을 출간한 유령 작가,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타워와 대만의 타이페이101 등 세계적인 마천루의 안전을 담당한 구조 공학가, 외교관들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동시통역사, 유명 밴드의 음악을 조율하는 녹음기사, 수술실 마취과 전문의 등 스포트라이트 없이 묵묵히 커튼 뒤에서 일하는 이들의 사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일이 얼마나 재밌으며, 그 과정에서 내가 뭘 했는가 하는 것"이라는 유령 작가 대니얼 페이스너의 말은 우리가 일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인비저블'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외적인 보상이나 명성에 큰 관심이 없으며, 그저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데 기쁨을 느낀다. 피트 플레먼츠는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무대 뒤에서 20년째 기타 테크니션으로 일하고 있다. 라디오헤드가 공연을 할 때는 밴드 멤버들의 요구에 따라 열두 대의 기타를 정신없이 튜닝하기도 한다. 그가 없었더라면 라디오헤드의 음악 역시 '사운드의 최첨단 혁신'이라는 평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1994년에는 라디오헤드의 프로덕션 매니저가 돼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기타와 장비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인비저블'의 두번째 특성은 치밀성, 세번째 특성은 무거운 책임감이다. 2009년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UN 총회에서 장장 95분에 걸쳐 두서없이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그의 개인 통역사가 75분이 지날 무렵, "더는 못하겠다"고 소리를 지른 뒤 쓰러져 버린 에피소드도 있다. 통역사들은 대부분 혹독한 훈련을 거친 엘리트들이지만, 회의가 시작되면 비좁은 통역실에 앉아 30분을 교대로 일한다. 사전에 참가자들의 이름과 온갖 축약어, 배경지식을 최대한으로 익혀야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유엔 통역사 윌킨스 아리는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을 동시에 하는 일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일에 몰입하게 되면 말하는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단순히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인비저블'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능력을 갖추고, 무한한 책임감과 성취감 등을 느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비저블'이 될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연구 결과를 인용해 '타인의 인정을 받는 일'이 그 실제 가치보다 훨씬 과장돼 있다는 점도 밝혀낸다. 적어도 뒤에서 묵묵히 일을 하면 손해 본다는 생각은 접어두라는 소리다. '만성적인 자기 노출'의 시대에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우리의 불안감을 잠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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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일에 꾸준히 매진한다면 컴퓨터(트위터, 페이스북 등)를 멀리한다고해도 성공이 알아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개인 브랜드와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 남의 관심을 갈구하며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보다는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인비저블 / 데이비드 즈와이그 / 박슬라 옮김 / 민음인 / 1만6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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