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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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명재 사회문화부장]우리 사회 여성들의 약진은 이젠 새로울 게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성들의 이 같은 활약상을 최근 들어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사실 여성들은 늘 당당한 절반이었다. 다만 남성 중심의 기억에서 왜곡되고 축소되고 은폐됐을 뿐이다. 이상국(호 빈섬)의 신간 '미인별곡'은 그 같은 왜곡과 축소를 걷어내고 우리 역사를 낮은 곳에서 지탱해 온 옛 여인들을 만난 기록이다. 지금 우리 여성들의 어엿한 면모가 비롯된 한 '발원지'를 보여주는 듯한 책이다.


여인들이 남긴 시와 서신, 기록 등 사료를 기반으로 그들의 실제 삶을 복원하면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그들의 내면까지 들여다본 이 책에는 17명의 옛 여인들이 소개되고 있다. 먼저 이들 여인은 왜 작가로부터 '미인'이라는 찬사를 얻게 된 것일까. 이들 중에는 분명 빼어난 용모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홀린 이들도 있지만 작가가 말하는 이들 미인의 아름다움은 남성들의 눈에 비친 미색(美色)이 아니다. 저자는 '미인'이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고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이들"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이들은 "열정의 아름다움으로, 용기의 아름다움으로, 재능의 아름다움으로, 또는 치열한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자기만의 생을 펼친 여인들이며, 그럼으로써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여인들"이다.


또 미색을 넘어선 삶에서 보여준 아름다움에서 미인을 찾는 저자의 정의는 그 만큼 적잖은 수고와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 점에서 이 책이 예사롭지 않은 역작임을 드러낸다.

저자는 미인들을 네 가지 부류로 나눈다. 전설의 무희 최승희, 유행가의 여왕 왕수복, 양반가의 부녀자로서 잘라낸 무명지로 대한독립을 쓴 남자현은 근현대 혼란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여인들이다. 김부용과 매창, 자동선, 그리고 황진이는 기생이라는 미천한 신분으로 세상의 규율을 박차고 한 시대를 풍미한 여인들로 조명된다. 퇴계학풍을 온몸으로 지켜낸 '여자 선비' 장계향,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소설 쓰기로 풀어보였던 완월당 등은 규방 안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여인들이다. 조선시대 궁중 여인사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많은 각색과 왜곡이 이뤄졌던 숙빈 최씨, 인현왕후, 장희빈 세 여인 간에 일어났던 일들도 각자의 시선에서 펼쳐진다.


시인이 섬세한 시선과 글로 전해주는 여인들의 삶을 읽다 보면 우리는 이들 여인에게 경탄하면서도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뭔가 빚을 지고 있다는 자책감을 갖게 된다. 그것은 장희빈이 살아 돌아온 환생녀의 입을 통해 토해 내는 하소연처럼 남성에 의해, 역사의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가 이들의 삶을 맥락이 지워진 앙상한 뼈대로만 남긴 것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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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미인들은 대부분 알려진 이름들이지만 작가는 더욱 깊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이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저자는 어떻게 그 같은 내밀한 얘기들을 전해줄 수 있게 된 것일까. 혹 여인들이 먼저 작가 앞으로 다가와 자기 얘기를 들려준 건 혹 아닐까. 여인들의 호의와 적선으로, 아니면 영매의 도움을 얻었던 덕분이 아나냐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저자 스스로 "그녀들만의 특별하고 진실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고요하고 예민한 귀를 갖지 못한 내가 머나먼 시간 저편의 여자들을 만나겠다고 나선 만용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작가의 '만용'은 여인들로부터 응답을 받았는데, 거기엔 무엇보다 저자가 지난 20년간 옛 여성의 삶에 매달린 부지런한 노력과 탐구열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즉 저자가 남성이면서 또한 여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모든 시인은 남성조차도 자신 안의 '여성'을 찾아내야 진정 시인이 된다는 점에서 저자가 남성이면서 여성이기도 한 시인이었기 때문에저자는 여성과 '내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적(性的) 차이라는 심연, 시간이라는 심연, 이 두 개의 심연을 넘어 그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여인들을 대한 마음가짐은 비단 옛 여인만이 아니라 우리와 한 시대를 살고 있는 여인들을 깊이 만나는 법, 그러니까 '미인'을 알아볼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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