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 중요한 이 문제를, 대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오래 전, '살인자란 인생에서 5분을 살인한 사람이다'라는 명제에 사로잡혀 있던 때가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살인자라 낙인을 찍어 그를 호명하면서 분노와 경계심을 보태지만, 그는 100년 인생에서 단 5분을 살인에 쓴 사람에 불과하다는 이 지적은, 듣는 당시에는, 무척 쇼킹했다. 살인자를 흥분의 숨소리를 거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냉철을 주는 말처럼 들렸다. '냉혈한(인 콜드 블러드)'이란 범죄 심리 소설로 유명해진 트루먼 카포티를 다룬 영화 '카포티'는, 살인자를 무방비 상태에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때 살인자는 맹수와 다름없이 느껴진다.
'5분 살인자'라는 개념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나쁜 인생을 사는 나쁜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고전적인 선악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내 생각을 깨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적인 악인은 없다는 저 의견은, 우리가 어떤 자를 악인으로 규정하고자 할 때 늘 상기하고 염두에 둬야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나쁜 짓들과 악당들은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뉘우침 없는 악과, 반복되는 악행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5분 살인자는, 그 이후 완전하게 인간 본연의 선한 상태로 리셋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개연성에 무게를 둔다면, 저 명제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인간은, 악한 인간이 아니라, 그 악에 대한 해석과 관점과 신념이 다른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에서 말해준 그 풀이를 믿지 않는다. 악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 마음과 태도, 혹은 악의 문제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그 마음과 태도가, 악을 발생시키며 지속시킨다. 악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악을 상습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지속적인 태도는 존재한다. 악을 저지르는 인간을, '약한 인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약점에 대한 보상심리이거나, 분노표출이라고 보는 것이다. 혹은 유혹에 대해 약하거나, 문제의 인식 체계나 가치 기준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바깥에서 악을 저지르는 인간이, 자신의 가족들을 끔찍히 아끼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의 내면은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 것일까. '악'이 삶의 체계로 자리잡을 때, 그 문제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여기에 '악'의 상대성과 '악'의 사이즈의 차이, 악이 빚어내는 결과의 모호함과 시차 따위가 악행의 문제점에 대해 둔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소한 나쁜 짓들과 너무 커서 잘 보이지 않는 나쁜 짓들이, 많은 사회적 유력자에 의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점들도 악인을 북돋운다. 인간은 저마다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악행이 주는 '잠정적인 이익'을 누리며 악에 넘나드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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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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