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보다 해몽’이라는 문장은, 문장 자체가 열려있습니다. 뒷말을 완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 꿈보다 해몽이 번드르르해서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아‘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 ‘꿈보다 해몽을 잘한다’ ‘꿈보다 해몽이 더 불길하네’ ‘꿈보다 해몽이 사람의 운명이 되는 거야’ 등등 아주 많은 의미로 바뀔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라는 사람은 ‘해몽(꿈의 해석)’ 하나만으로 세상을 깨운 사람이니, 그에게는 꿈보다 해몽이 훨씬 고마운 것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꿈과 해몽은 애당초 따로 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해몽은 인간의 것이고 꿈은 신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의 것에 다는 인간의 주석들이란, 자주 틀리고 자주 우스꽝스럽고 자주 오버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통역하는 종교니 신앙이니 접신이니 예언이니 간구는, 인간과 신의 경계를 자주 왔다갔다 하지만, 어떤 때는 신에 치우쳐 허황해지고 어떤 때는 인간에 밀착해 얍쌉하고 속되기 마련입니다. 해몽 또한 허황함과 속된 사기(詐欺)를 넘나드는 것입니다.
‘꿈보다 해몽’에 붙어있는 조사 ‘보다’는 의미심장합니다. 두 객체를 비교하면서 ‘해몽’을 비교적인 우위에 두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꿈이 팩트이고 해몽은 그것의 주석일 뿐인데, 해몽을 우위에 두는 저 생각은 왜 나온 것일까요.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 우리의 판단과 신념을 이루는 것은, 팩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고 보는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해석이 꿈을 흔들며 해석의 꼬리가 꿈의 몸통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해석이 바뀌면 꿈의 본질이 바뀝니다. 꿈을 해석하는 행위들은 꿈의 권력을 인간의 권력으로 바꾸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해몽은, 인간이 세상의 문제를 오해를 통해 해결해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오해는 인간을 수많은 오류와 착오와 오작동 속에 빠뜨렸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을 추동해온 어리석음의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돌을 호랑이라고 보고 쏘면 돌이 뚫리지만 돌이라고 보고 쏘니 뚫리지 않더라는 옛 고사도 있습니다. 해몽은 꿈을 흔듭니다. 해몽이 바로 꿈입니다. 해몽을 하는 일은, 꿈을 다시 꾸는 일입니다. 삶의 문제들은 해몽입니다. 해몽을 어떻게 하느냐가 본질을 바꿉니다. 해몽의 힘을 믿으십시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