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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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시골 가는 거.... 실은 어떤 그림 그리는 아줌마 부탁 땜이야. 자기 시골에 작업실이 있는데 당분간 그곳에 좀 가있어 달래.”
“왜?”
커피를 홀짝거리다 말고 배문자가 하림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야기 하자면 좀 긴 내용인데, 자기 고향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개를 쏘아죽였다는구먼. 혼자 사시는 자기 고모 할머니집 누렁이개 두 마리를 말이야.”
“응? 그러니까, 너더러 범인을 잡아달라는 거야?”
“아니.”
“그럼?”


“하여간 그래. 어쨌든 그 시골에 내려가서 당분간 머물다 올 생각이야. 그렇지 않아도 학원도 문을 닫고 하여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거든.”
하림은 변명삼아 말했다. 하긴 자기가 생각해도 뚜렷한 목표가 있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일에 자기가 끼어드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닐까 잘 판단도 서질 않았다. 윤여사가 준 열쇠가 마음에 걸려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윤여사도 잘 모르는, 무언가 자기를 끌어당기고 있는 야릇한 힘에 끌린 것인지도 몰랐다.

“잘 됐네, 뭐.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고 쓰기엔 딱이잖아.”
그리고 나서 배문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더니 일어나서 책상 쪽으로 가서 서랍을 연 다음, 무언가를 꺼내들고 왔다. 제법 두툼한 봉투였다. 그것을 탁자 위에 던지면서 말했다.
“선불 원고료야.”
“응? 필요 없는데.....”
“넣어둬. 어차피 지금 받아나 나중에 받아나 그게 그거니까.”


그녀는 인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그래도 함께 라면을 끓여먹었던 정이라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림은 잠시 망설이다가 봉투를 집어 천천히 안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영화 속 청부살인업자라도 된 것 같은 포즈였다.
“펑크 내면 안 돼. 이게 얼마나 중요한 기획인지 몰라.”
배문자가 다시 편집장으로 돌아와 단단한 목소리로 다짐이라도 하듯 말했다.
“알았어. 고마워.”

하림은 남은 커피를 홀짝 다 마신 다음,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 다음 달에 결혼한다.”
“.......”
그녀가 따라 일어나며 짐짓 외면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 사람이랑....?”
“응.”
굳지 꽁지머리냐고 묻지 않아도 되었다. 하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나..... 결혼식 안 가도 되지?”
그러자 배문자가 훗, 하고 웃었다.
“오지 마, 인간아! 제발.”
“알았어. 행복하게 살아야 해.”
하림이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소용없는 말인 줄 알았지만 그래도 진심은 진심이었다.


돌아서 문 쪽을 향해 걸어 나오는데 괜히 가슴 한쪽이 뻥 뚫어진 느낌이 들었다. 뻥 뚫린 가슴으로 한 줄기 바람이 휑하고 불어갔다. 이미 떠난 그녀였는데 무슨 아쉬움이라도 남아 있었던 걸까. 그래도 한때는 서로 몸을 섞었고, 이마를 맞대고 후후거리며 라면을 먹던 사이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 남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신의 결혼을 알렸고, 자기 역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듣고 농담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가까운 옆 자리에는 지금 꽁지머리가 있었고, 자기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지금 혜경이 있었다. 생의 수수께끼가 의문부호처럼 묵직하게 가슴 안쪽에 드리워졌다. 배문자의 시선은 잠시 하림의 등 뒤에 따라오다가 곧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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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온 하림은 총총히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청동빛 하늘에서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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