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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김진규, 철인이 제대로 '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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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FC서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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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고교 시절부터 이미 한국축구의 10년을 책임질 수비수로 불렸다. 두꺼운 허벅지로 대표되는 탄탄한 체격. 뿜어내는 파워는 대단했다. 저돌적 플레이와 넘치는 승부근성은 불 같은 성격과 투박함을 가렸다. 김태영의 뒤를 이을 파이터형 수비수에겐 ‘철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김진규(FC서울)였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건 수순이었다. 청소년대표팀, 올림픽 대표팀에 이어 19세 나이로 A대표팀에도 뽑혔다. 두 번의 아시안컵과 한 번의 월드컵에 나섰다. 스물셋 나이에 A매치 경력은 무려 41경기에 달했다. 두려울 것 없던 시기. 태극마크에 대한 감흥도 적었다. 당연한 줄 알았으니까.
모든 건 갑자기 변했다. 대표팀 사령탑이 바뀌면서 김진규와 A매치의 인연도 끊어졌다. 상한 자존심은 오기 대신 안주로 이어졌다. 까짓 프로에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K리그 우승까지 거머쥐고도 마음엔 야망이 없었다. 가장 큰 장점이던 열정이 사라지니 철없는 다혈질만 남았고, 기량은 정체됐다. 월드컵이 보기 싫어 제주도로 도망가기도 했다. 한창 전성기를 달릴 나이에 '한물간 수비수'가 돼 버린 셈이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정상급 수비수로 거듭하고, 다시금 태극마크를 찾고 싶었다. 돌파구로 삼은 건 해외 진출. 뜻대로 되진 않았다. 불운과 악재가 겹치며 1년을 허송세월했다. 결국 올해 초 친정팀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남들은 실패라고 했지만, 스스로는 전화위복이라 생각했다. 시련을 겪으며 선수 그리고 인간으로서 성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때 '욱하는 성질'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자신이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었다.
워낙 강했던 옛 이미지를 완전히 벗진 못했지만, 확실히 올 시즌 김진규는 예전과 다르다. 그라운드에서 한결 침착해졌고, '골 넣는 수비수' 면모까지 보인다. 선수로서 욕심도 살아났다. 라이벌전 설욕과 K리그 정상 탈환은 기본이다. 태극마크도 이젠 간절하단다. 이젠 색안경을 벗고 김진규를 다시 볼 때가 된 것 같다. 철인이 말 그대로 철이 들었다. 근거는 인터뷰 내내 묻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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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 감독님, 아부하는 거 아닙니다.”

이렇게 마주앉아 얘기나누는 건 지난 2월 개막 미디어데이 이후 반년만이다. 그때 시즌 목표를 팀 우승과 최소 실점으로 꼽았던 걸 기억한다. 서울이 올 시즌 전반기를 1위로 마쳤고, 최소 실점까지 기록했으니 일단 절반은 성공한 셈인데
초반 기세가 좋았다. ‘잘하면 열 골도 안 먹고 시즌 끝낼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올 시즌 경기가 많아지지 않았나. 갈수록 체력적 한계에 맞닥뜨렸고, 자연스레 집중력도 떨어지면서 골을 좀 허용했다. 전반기 30라운드 마치고 우리 팀 모든 실점 장면을 다시 봤는데, 상대가 잘한 것보단 대부분 우리 실수로 골을 먹었더라. 후반기 스플릿에선 강팀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실수를 줄이는 게 최우선이다. 우리 팀은 전방에 골 넣을 자원이 많기 때문에 실점만 막으면 된다.

2010년 우승한 뒤 1년 만에 돌아왔었다. 그때와 공통점 혹은 차이점이 있다면
팀 분위기 자체는 2010년에도 좋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최용수 감독님이다. 다시 한 번 대단한 분이란 걸 느꼈다. 절대 아부가 아니다.(웃음) 아마 우리 팀 모든 선수가 고개를 끄덕끄덕할 거다. 어찌 보면 ‘초보감독’아닌가. 그런데도 선수시절부터 워낙 여러 훌륭한 감독님들 밑에서 배우셔서 그런지, 그분들의 장점만 쏙쏙 모아놓은 것 같다. 내 짧은 생각이지만, 웬만한 베테랑 감독도 능가하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렇나
‘스타 출신’ 감독이지 않나. 덕분에 선수들을 다룰 줄 안다. 사실 감독님은 말수가 적은 편이다. 지적도 많이 안 한다. 하지만 한번 휘어잡아야 할 땐 확실하다. 분위기를 잡아야 할 타이밍을 정확히 읽어낸다. 또 감독님이 무게 잡는 스타일도 아니다. 코치 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역할 뿐이다. 한 시간 훈련하면 절반은 장난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든다. 선수에게 줄 건 주고, 할 건 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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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최 감독 부임 후 서울 선수단이 확실히 변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예전엔 스타군단만의 개인주의랄까, ‘깍쟁이’ 이미지가 다소 강했는데, 지금은 그런 색깔이 별로 없다
일단 감독님부터 그런 걸 못 본다. 올 시즌 준비할 때부터도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많이 원했다. 어쩌면 경기 내용보다도 그걸 더 강조하는 것 같다. (웃음) 아마 그래서 올해 우리가 연패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서울에서 5년 정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수원전 같은 큰 경기를 지고 나면 십중팔구 연패에 빠졌었다. 올해는 다르다. 경기에 져도 일단 감독님부터 “신경 쓰지 마라, 다음 경기만 준비해라” 이렇게 북돋아 준다. 그러니 선수들도 하나가 돼서 더 열심히 하고…. 감독님은 확실히 ‘보스 기질’이 있다.

그럼 수비수란 입장에서 보면 예전과 지금의 서울은 어떻게 다른가
2010년도에는 4-4-2 포메이션을 많이 썼다. 지금은 4-1-4-1 혹은 4-2-3-1을 쓰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최 감독님 역할이 크다. 팀에 꼭 맞는 전술을 채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 아무래도 올 시즌은 스플릿 시스템이도 있다 보니, 수비도 강조하신다. 일단 뒷문이 안정해야 골도 넣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팀 수비가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젠 골 넣는 수비수다

올 시즌 김진규하면 골 얘기 안 할 수가 없다. 이전 K리그 6시즌 통틀어 5골을 넣었는데, 올 시즌엔 벌써 네 골이다. 특히 7월 인천전에선 전매특허였던 대포알 프리킥으로 골을 넣고, 이어진 부산전(6-0 승)에선 데뷔 첫 멀티골도 넣었다. 올해는 머리나 발등에 공이 얹히는 느낌이 좀 달라진건가
(손사래 치며) 아니다. 특별한 건 없다. 그냥 운이다. 첫 골 넣었던 성남전(1-0 승)은 확실히 그랬고, 부산전도 첫 골은 페널티킥이었던데다 추가골 역시 행운이 좀 따랐다. 하긴 인천전에선 그쪽으로 차겠다고 마음먹고 때렸는데 들어가서 기분이 좋긴 했다. (웃음)

겸손하게 말했지만, 사실 부산전 페널티킥 골은 꽤 중요했다. 당시 앞선 경기들에서 데얀에 몰리나까지 페널티킥을 줄줄이 실축했었다. 그런 가운데 넣었던 페널티킥 골이라 확실히 의미가 있었는데
맞다. 그때 한창 우리 팀 페널티킥이 안 들어갔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좀 자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속으로 ‘한 번만 기회 주면 잘 할 수 있는데….하면서 감독님 앞에서 기웃거렸던데, 마침 딱 기회를 주시더라. (웃음) 올해 그게 내 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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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수(알 사드)나 곽태휘(울산)만 봐도 확실히 득점력 있는 수비수는 그 존재감이 남다르다. 특히 서울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데몰리션 듀오’(데얀-몰리나)에 화력이 집중되는 것이지 않나. 그렇기에 ‘골 넣는 김진규’는 확실히 큰 힘이란 생각인데
물론 지적한 대로 우리 팀은 데얀이나 몰리나가 막히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 선수들 골이 좀 나면서 상대 견제를 분산시켜야 한다. 다만 그건 전방에 (하)대성이나 (고)명진이, (정)조국이형 (최)태욱이형 등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냥 조력자다.

그런 점에 대해 선수들끼리도 자주 얘기하겠다
우리 팀은 외국인 선수들과 국내 선수들의 의사소통이 엄청 잘된다. 내 생각에 아마 K리그 전체에서 최고일 거다. 경기하다 보면 불협화음이나 안 좋은 점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같이 모여 밥 먹으면서 얘기를 많이 한다. 데얀만 해도 어휴, 말하는 걸 너무 좋아한다. (웃음) 언어 문제는 없다. 완벽하진 않아도 다들 영어는 조금씩 다 할 줄 알고,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화하려는 의지니까. 얘기하면 서로 다 안다. 그렇게 문제를 빨리 해결하니까 팀 전체에도 큰 도움이 된다.

김동우, 김주영, 아디 등 팀 내 좋은 중앙수비 자원이 많은 가운데에서도 거의 모든 경기에 선발 출장했다. 주전 입지가 공고한 셈인데, 누구랑 호흡이 가장 잘 맞나
일단 내가 붙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실 나보다 뛰어난 동료가 너무 많다. 나는 어찌 보면 밋밋한 선수고…. 덕분에 파트너 덕을 많이 본다. (김)동우는 한국에서 헤딩을 최고로 잘하는 선수 중 한 명이고, (김)주영이는 K리그에서 제일 빠른 수비수다. 아디는 말할 것도 없고. 상대팀에 장신 공격수가 나오면 동우가 제공권 싸움을 맡고, 빠른 공격수가 나오면 주영이가 커버 플레이를 해준다. 나는 옆에서 컨트롤만 해주면 된다.

그게 제일 어려운 것 아닌가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동료들이 워낙 잘 해주니까 내가 실력 이상으로 더 잘해 보이는 것 같다. (웃음) 솔직히 처음에는 동우랑 더 잘 맞았다. 예전에 같이 뛰어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러다 시즌 중반부터는 주영이랑 하는 게 또 편하더라. 이젠 두 명 다 내가 스타일을 아니까 누가 들어와도 잘 맞출 수 있다. 그만큼 서울 수비도 더 탄탄해지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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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달라지는 상대, 수원

조금 난감한 질문일 수 있지만, 수원 얘기 안 해볼 수 없다. 수원전 6연패 중이다. 평소 K리그 잘 안보는 내 지인들조차 “그런데 서울은 왜 수원에 못 이기는데”라고 물어볼 지경이다
휴…. 그러니 우린 오죽 답답하겠나. 특정 팀에 계속 진다는 것 자체가 강팀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그게 또 수원이니까. 선수들도 많이 괴로워했다. 물론 우리가 좀 조급한 면이 있다. 연패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에 자꾸 우리 스타일대로 공격적으로 나가는데, 그러다 역습으로 골을 내주고 나면 정말 힘이 빠져 버린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됐다. 이해 못 할 판정까지 나와 더 힘들다. 나만 해도 최근 수원과의 홈경기에서 졌을 때 전반 초반 페널티킥을 내줬는데, 사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그걸 파울이라고 할 줄 몰랐다. 그저 몸싸움 도중이었을 뿐인데 푸싱 파울을 불더라.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중계 화면을 다시 봤는데, 내가 그런 표정 짓고 있는 줄 몰랐다.(웃음) 후반에 양상민의 파울에 퇴장을 안 준 것도 불만이었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심판 판정도 우리가 안고 가야할 부분이다. 그것도 실력이다.

두 팀간 '슈퍼매치'를 두고 언론이나 팬들이야 늘 뜨겁지만, 실제 선수들은 어느 정도인가? 다른 경기와는 다른 게 있나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듣기론 수원이 좀 더 심하다고 한다. 훈련할 때 눈빛부터 달라진다더라. 물론 우리도 수원전 앞두면 분위기가 좀 더 결연해진다. 경기력이나 집중력 모두 좋아진다. 라이벌 관계이기도 하고, 팬들도 워낙 좋아해 주는 경기라 그런 듯 하다. 내 생각에 제일 좋은 건 FA컵이나 AFC챔피언스리그 같은 토너먼트 결승에서 두 팀이 만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 팬들에게도 한국 축구에 이런 경기가 있다는 걸 더 보여줄 수 있으니까.

하긴 지난 8월 홈경기에서 0-2로 졌을 때, 믹스트존에서 하대성조차 인터뷰를 거절하더라.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선수여서, 취재진조차 두 번 잡질 못했다
(하)대성이가 주장이긴 하지만, 나도 부주장이고 선배이기도 해서 자주 밥도 같이 먹고 내가 많이 도와주려고 한다. 그날도 경기 끝나고 대성이랑 같이 밥을 먹었는데, 나한테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더라. 사실 그전에도 대성이가 수원만은 꼭 이기고 싶어했었다. 대성이가 화내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데, 그날만큼은 후배들한테 화도 내고…. 팀 전체가 정말 준비를 잘해서 나갔던 경기였는데 결과가 그렇게 나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서울-전북-수원 사이의 먹이사슬이 재밌다. 서울은 전북에 굉장히 강한 반면, 수원에는 약하다. 그런데 또 전북은 수원을 상대로 잘한다
내가 수원 경기를 잘 안 보는데, 얼마 전 우연찮게 수원-성남 경기를 봤다. 재밌는 게 보스나나 (곽)희주형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우리랑 할 땐 정말 열심히 한다. 진짜 보스나는 어휴…. 난 외국인 선수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태클하고 헤딩하는 거 처음 봤다. 그런데 다른 팀과의 경기에선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더라.(웃음) 대표팀 갔을 때도 (이)동국이형이 그러더라. 우린 수원 잡는 게 제일 쉬운데, 너흰 왜 그렇게 못 이기냐고. 우린 아주 죽겠는데 말이다. 대표팀 코치 한 분도 지난달 잠비아전 마치고 해산할 때 내게 “한번은 이겨라. 뭐냐 그게~”하면서 면박을 주셨다. 이젠 모든 축구인의 관심사가 돼버린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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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월드컵을 피해 제주도로 피난가다

방금 대표팀 얘기도 나왔으니 주제를 돌려보자. 8월 잠비아와의 평가전 앞두고 4년 만에 대표팀에 재승선했다. 올해 초 만났을 때 “벤치에 앉아만 있어도, 연습 파트너만 돼도 좋으니 파주NFC 공기를 다시 마셔보고 싶다”라고 했었다. 태극마크 다시 달았던 소감 좀 얘기해달라
사실 대표팀 명단 발표 전날 미리 발탁 소식을 들었다. 누구라고 콕 찝어 얘기는 안 하겠지만, 런던에서 축구하는 친한 후배 하나가 전화가 왔었다. 느닷없이 “형 대표팀 됐다며? 축하해”라고 하더라. 워낙 나한테 장난 많이 치는 녀석이라 “웃기지 마라”하면서 그냥 끊었는데, 다음날 대표팀 명단에 정말 내 이름이 있었다. (웃음) 처음엔 약간 어벙벙했다. 당시 최강희 감독님이 K리거로만 뽑을 거라 해서 기대는 조금 했지만, 괜히 마음에 상처만 입을까 봐 일부러 생각 많이 안 했었다. 그날 주변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기뻐해 주는 모습 보면서 정말 행복했다. 올해 유독 축구 선수라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동안 감독님이나 코치 선생님들도 “열심히 해서 네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란 얘기 많이 해주셨었는데, 정말 감사했었다. 비록 이번 우즈벡 원정 명단에선 다시 제외됐지만, 꼭 다시 들어가고 싶다.

4년 만에 대표팀 유니폼 받았을 때 기분, 솔직히 어땠나
아…. 정말 너무 너무 좋더라. 대성이랑 같은 방을 썼는데, 창피한 것도 모르고 유니폼 입은 채로 ‘셀카’여러 장 찍었다. 호랑이 앰블렘 잘 나오게 해서. 뒤에서 대성이가 엄청 웃더라. 4년 만에 들어가서 그런지 재밌는 일도 있었다. 장비 담당하는 형이 유니폼을 챙겨줬는데, 상의는 딱 맞는데 하의가 완전 꽉 끼는 거다. 무슨 타이즈처럼. 그래서 그 형한테 “나 오랜만에 왔다고 애들한테 웃음 주려고 이런 거 줬냐”라고 막 따졌었다. (웃음)

최근 몇 년 동안 호랑이 앰블렘과 인연이 없었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프로 데뷔와 동시에 대표팀에도 발탁됐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잠비아전 명단에선 이동국, 김정우 다음으로 A매치 경력(42경기)이 많은 선수였다. 심지어 곽태휘(26경기)보다도 많더라
아직도 그런가? 몰랐었다.(웃음) 솔직히 태극마크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도 있었는데, 2008년에 처음 대표팀 떨어졌을 때 많이 괴로워했었다. 가장 힘든 건 부모님이셨다. 오가는 동네 사람들이 “왜 진규는 대표 안 뽑혔냐”라고 하도 물어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을 거다. 억측도 많았다. 내가 허정무 감독님과 나쁜 일이 있어서 찍혔다는 소문까지 진실처럼 돌았다. 확실히 말하지만 그런 거 전혀 없다. 다만 감독님이 원하는 수비수 유형과 내가 달랐던 것뿐이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 가지 못해 더 괴로웠을 것 같다. 4년 전 독일월드컵에도 나갔었으니까. 듣기론 월드컵 기간에 제주로 ‘피난’같다고 하던데
(한숨쉬며) 거기도 축구는…하더라.

그때 얘기 좀 자세하게 얘기해달라
월드컵 휴식기였다. 서울은 워낙 응원 열기가 대단하니까. 머리도 식힐 겸 제주도로 휴가를 갔었다. 솔직히 월드컵 보기 싫었다. 볼 자신이 없더라. ‘내가 저기서 뛰고 있어야 하는데’란 생각에. 콘도에 머물렀는데, 설마 따로 스크린 설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거기도 걸더라. 어휴…. (웃음) 그래도 이상하게 막상 경기한다고 하니까 보고 싶더라. 내가 유명한 선수는 아니지만 괜히 누가 알아볼까 봐 모자 쓰고 맨 뒤에서 봤다. 잘 하더라. 결정적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오!”하면서 몸 들썩이게 되고…. 나중엔 그냥 재밌게 봤다. (웃음)

그래서 더 칼을 갈았을 것 같다
처음 대표팀에서 제외됐을 땐 많이 당황했었다. '까짓 거 안가' 하는 괜한 반항심도 생겼었다. 그러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당장 눈앞의 상황만 볼 게 아니라, 팀에서 열심히 잘하면 언젠가 다시 한 번쯤 대표팀에서도 불러주겠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조급함이 사라지고 인내심이 생기더라. 사람으로서 조금 더 성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일본에서의 악몽

결국 그 해 서울에서 K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또 문제가 있었다. 워낙 팀이 잘하다 보니, 스스로 그릇이 작아지는 게 느껴졌다. 선수라면 대표팀 욕심도 부리고, 더 잘하려는 마음이 생겨야 한다. 그런데 나중엔 그냥 팀이 이기는 것만으로 기쁘고 만족하게 되더라. 성장도 거기서 멈춰 버렸다. 매너리즘이었다. 우승하고 나니 고민이 절정에 달하더라. 변화를 주고 싶었다.

결국 이듬해 중국 슈퍼리그로 진출했었다. 그 때 다들 많이 의아했었다. 아무리 새로운 도전이라고 해도 대표팀 출신이자 K리그 우승팀 센터백이 중국 리그라니
원래 중국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중동에 가려고 했었다. (이)정수형, (조)용형이형이 뛰는 카타르리그 팀에서 오퍼가 왔었다. 사인만 하면 되는 단계였다. 그때 다렌 스더에 있던 박성화 감독님의 전화가 왔다. 박 감독님은 18살 때부터 사실상 나를 키워준 분이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내가 제자로서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내가 이적을 준비하고 있단 얘기를 들으시고 연락을 주신 거다. 함께 우승에 도전해보자고 하셨다. 실제로 다렌은 중국 내 명문팀이고, 직전 시즌에 감독님이 맡으면서 후기리그 우승까지 했었다. 아디가 뛰었던 팀이기도 했고. 그래도 처음엔 싫어서 고민을 많이 했었다. 생각해보니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등 감독님과 함께 있었을 때 좋은 기억이 많더라. 선수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그런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중국에서 잘하면 또 다른 기회도 열릴 테고. 그래서 결단을 내리게 됐었다.

하지만 정작 중국 가서 몸고생-마음고생은 다했다
하아…. 중국 선수들이 어떤지 미리 좀 알고 갔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충격이었다. 감독한테 대드는 건 다반사고, 훈련할 땐 동료에게조차 심한 파울을 하더라. 다들 자기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안 해도 다른 누군가 하겠지’란 태도도 있고. 여러모로 프로의식이나 팀 정신이 부족하다. 특히 주장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사사건건 감독님께 반항하더니, 결국 선수들을 하나씩 포섭해서 반기를 들더라. 그게 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정이 딱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무릎이 안 좋아서 경기에 나서지 않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경질되셨다. 그 길로 구단에 찾아가 정중히 이적을 요청했다.

결국 중국 진출 6개월 만에 일본 J리그로 갔지만 거기서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반포레 고후에 입단했는데, 가자마자 감독이 경질됐다. 심한 부상까지 당했다. 또 강등권에 있다 보니 선수단 분위기가 안 좋았다. 설상가상 새 감독이 수비 라인을 전부 일본 애들로 짜버리더라. 이해는 됐다. 수술까지 하게 돼서 시즌 끝나기 전 일찌감치 귀국했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다렌에서 나올 때부터 서울 생각이 났다. 어떻게든 돌아가야겠단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땐 이적 시기가 맞지 않았고, 반년이 지난 뒤에야 서울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처음 팀에 합류했는데 정말 기뻤다. 내가 이 좋은 팀을 왜 나갔나 싶더라(웃음). 그래도 작년 11월이 선수로선 가장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어느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국제 대회에 나가는 것보다 더 많이.

어떤 점에서 그랬나
머리다. 힘든 시기를 겪다 보니 사람이 긍정적으로 바뀌더라. 또 팀에 돌아왔을 땐 동우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주영이도 곧 이적해 온다는 얘기가 나왔다. 입지를 쌓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운동했다. 수술하면서 체중도 10kg가량 불었고, 몸도 완전치 않아 동계 전지훈련 기간 동안 감독님이 종종 훈련을 빼주셨었다. 그래도 쉬는 대신 조깅하고 웨이트하면서 몸을 만들었다. 그때 그렇게 한 덕분에 올 시즌 체력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사진=FC서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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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제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김진규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흥분’이다. 워낙 다혈질 성격이 유명하지 않나. 그런데 올 시즌 앞두고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이 또 없었다”라며 흥분을 자제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실제로도 팀 관계자들은 “김진규가 달라졌다”는 얘기 종종 한다. 반면 팬들은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많은데
올해 딱 한 번 흥분했다. 수원과의 FA컵 16강전. 그때는 일부로 그랬다. 심한 파울로 퇴장을 당했었는데, 사실 파울 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탈락이 확정적이었고, 그날 수원 선수들이 굉장히 거칠게 나왔었다. 우리 홈경기가 남아있던 때여서 기가 죽을 수 없단 생각에 파울을 저질렀는데, 하필 상대가 제일 친한 후배 중 하나인 (오)장은이었다. 끝나고 굉장히 미안해했었다.

그렇다곤 해도 워낙 주목받던 경기여서, 팬들은 “아, 김진규 또 저런다” 했었다
내가 늘 그런 이미지다 보니 그렇다. 가까운 사람 중엔 내가 수원전만큼은 안 뛰었으면 좋겠다는 이들도 있다. 괜찮다. 이미지는 점점 바뀌어 갈 거니까. 다른 경기 때는 그런 적 거의 없다. 무엇보다 내가 흥분하면 후배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오히려 내가 괜찮다고 다독여줘야 한다. 우리 팀엔 ‘스타 의식’이 있는 선수가 많다. 그런 선수들이 자칫 흥분하면 한 마디로 ‘멘붕’이 온다. 자제를 시켜줘야 한다. 나 때문에 팀이 망가져서야 되겠나.

올해 우승이란 목표를 달성한다면? 2010년처럼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싶어지는 것 아닐까
일단 내가 요즘 스카우트 제의를 많이 받고 있다. 상무에서도 연락 오고 경찰청도 러브콜을 보낸다.(웃음) 일단 올해를 끝으로 군에 입대할 계획이다. 조만간 원서도 준비할 거다. 그 전에 나를 믿고 이끌어준 코칭스태프와 구단 직원들이 위해서 우승을 선물하고 싶다.

그 이후의 김진규의 축구 인생에 대해선 어떻게 설계하고 있나
일단 선수 생활을 아주 길게 할 생각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서른셋, 넷쯤에 은퇴하려고 했다. 또 예전 독일월드컵 때 (최)진철이형이랑 한 방을 썼는데, 형을 보면서 축구 오래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주변에서 ‘은퇴 언제할 거냐’, ‘젊은 애들이랑 뛰기 힘들지 않냐’란 말 많이 듣는 것도 고역이더라. 마치 명절 때 친척들이 결혼 재촉하는 것처럼(웃음) 내가 지도자 욕심이 좀 있다. 중고등학교 선수들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올라오고 싶다. 벌써 3급 지도자 자격증도 따 놨다. 최용수 감독님처럼 선수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장난도 칠 줄 아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지금도 우리 팀 코칭스태프를 보면서 많이 배운다. 사실 몰래 코치님들 훈련 프로그램도 베껴서 공부하곤 한다. (웃음)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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