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공짜 점심 OK' '무상 보육 OK' '반값 등록금 OK' '부자 증세 OK'.


여야가 복사한 듯 닮은 공약집을 들고 선거에서 맞붙는 해다. 한나라당은 '평생 맞춤형 복지정책', 민주통합당은 '3+3' 정책이라 부르지만, 알맹이는 그게 그거다.

'이건희 회장 손자에게도 공짜 밥을 줘야 하느냐'던 한나라당은 슬그머니 민주통합당과 같은 줄에 섰다. 한나라당 경기도 의회 의원들은 한 술 더 떠 고등학교도 공짜로 다니게 하자고 말한다. 대의는 거창해도 셈 법은 간단하다. 이게 다 '표'때문이다.


대형 정치 이벤트가 줄잇는 올해, 복지담론은 핫 이슈다. '모두 공짜, 예외 없음'을 내세운 보편적 복지 정책들은 진열하기 무섭게 팔려나가는 히트 상품이다. 가난한 사람만 골라 돕자는 선택적 복지는 철 지난 재고 신세다. 급기야 '무상 급식, 무상 보육은 원래 우리 정책'이라며 '저작권'을 주장하고 나선 야당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정치색이 극명히 갈리는 여야가 '같은 복지'를 말하는 촌극, 그 뒤엔 유권자들의 수요가 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복지 홍수의 원인을 이렇게 정리한다. "한마디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난 15년여 동안 추진된 시장주의(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해 국민들이 회의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장 교수는 특히 "2008년 국제 금융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가져왔던 시장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짚었다.


장 교수의 말처럼 따라가려 안간힘 쓰던 미국 경제가 한 순간에 무너져내릴 때 국민들은 '변심'했는지도 모른다. 고용 없는 성장은 일자리 부족을 불렀고, 사회 불평등도는 높아져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늘었다. 실패를 '무능한 내 탓'으로 돌리던 국민들은 사회 구조에 눈을 돌렸다. '경쟁으로 쟁취하라'는 명제는 너덜너덜해졌다.


극심한 '신 자유주의 피로'는 당의정(糖衣錠·쓴 약의 겉에 설탕을 발라 먹기 좋게 만든 것) 같은 복지담론을 불렀다. 하지만 늘어난 복지가 무거운 세금과 세트 메뉴라는 걸 설명해주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경제 사정을 보면 국민들의 복지 수요엔 이유가 있다. 지난해 가계금융조사 결과를 보면, 1년 사이 소득 하위 20% 가구(1분위)의 자산은 2.6% 줄었지만, 상위 20% 가구(5분위)의 자산은 3.2% 늘었다. 아래서 20% 가구의 평균 자산은 1억846만원이었지만, 위에서 20% 가구의 자산은 6억5281만원이었다. 가난한 집과 부잣집 사이의 평균 자산이 5억4435만원이나 차이 났다.


가난한 가구에 늘어난 건 빚 뿐. 아래서 20% 가구 중 열 집에 세 집은 빚이 있었고, 1년 사이 빚의 규모도 5.8% 늘어 평균 4400만원씩을 갚아야 했다. 위에서 20% 가구의 평균 부채는 절대 금액이 1억5530만원으로 더 컸지만, 1년 새 2.4% 늘어나는 데 그쳤다.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액 격차는 더 벌어졌다. 아래서 20% 가구는 5.3% 자산이 줄었고, 위에서 20% 가구는 3% 자산이 늘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이 있을까. 한나라당은 '늘어난 복지=무거운 세금' 이 간단한 도식을 끝내 국민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했지만, 돈을 쓰려면 재원이 있어야 한다. 복지담론과 맞물려 '부자 증세'가 거론되는 건 그저 부자들이 배 아파서만은 아니다.


'성장과 감세'를 내걸어 정권을 잡은 여당은 야당과 손잡고 지난 연말 상임위에서 부결된 소득세 최고세율 신설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각종 공제, 비과세 제도 뒤에서 세금을 피해가는 이들, 법인 사업자나 고소득 자영업자, 자산 부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따지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불과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추가 감세 철회를 하면 야당의 '부자 감세' 논리는 잠재울 수 있겠지만, 우리 당 지지자들은 '무슨 이런 당이 있느냐'고 돌아설 것"이라던 한나라당 나성린 의원 등이 증세에 앞장서는 모습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다.


일방적인 복지담론이 걱정스러운 건 그래서다. 요사이 복지담론엔 이성이 사라지고 감성만 남은 듯 하다. 부자나 대기업과 가까워 보이는 정권에 대한 불만이 팍팍한 현실이 맞물려 '정책 유(U)턴'을 이끌었고, 정치권은 책임 못 질 복지 시리즈로 표를 흥정한다. 민심이 들끓을 때 구호는 쉽게 현실을 왜곡한다. 경제 지표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던 참여정부 말 '민생 파탄의 책임을 묻겠다'며 들어선 게 이명박 정부다.


보편적 복지엔 보편적 부담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되새겨볼 때다. 국회가 전격 처리한 부자 증세안으로 더 걷을 수 있는 돈은 채 8000억원이 안 된다. 내년도 반값 등록금 예산 1조7500억원의 절반도 충당할 수 없는 돈이다.


그러니 보편적 복지를 '공동구매' 개념으로 이해하는 장 교수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는 "교육, 육아, 질병, 노령, 실업, 산업재해 등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어려움 에 대비하는 사회보험을 전 국민이 '공동 구매'하는 제도"로 이해하면 쉽다고 얘기한다.


아울러 '진짜 복지' '실천할 수 있는 복지'의 개념을 가다듬자는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중산층의 생활비 부담을 줄여주는 게 진짜 복지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일자리를 잡기까지 우리 국민들은 근 30여년을 학원 다니며 보낸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 비싼 사교육비와 연결되면, 중산층이 체감하는 삶의 질은 좋아지기 어렵다.


"중산층이 '맞벌이 함정'에 빠졌다"는 로버트 프랭크 코넬대 존슨경영대학원 교수의 지적은 남 얘기가 아니다. 그는 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예전엔 혼자 벌어도 그럭저럭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많은 중산층이 맞벌이를 하면서도 허덕인다"며 "그건 '교육'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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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면 집세가 비싼 동네로 이사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노역 지수'가 치솟아 삶의 질이 낮아진다는 주장이다. 노역지수는 중간 소득의 근로자가 중간 가격의 집세를 내기 위해 한 달에 일해야 하는 시간을 말한다.


'우리 애 학교 때문에 대전(대치동 전세)으로 이사했어.' 이런 씁쓸한 농담이 일상이 된 나라, 자녀 세대의 교육을 위해 부모 세대의 복지가 희생되는 현실에도 이젠 정말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박연미 기자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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