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의 여자도 여행 1>

                                                                                                      곽 재 구

살아있음이란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 일입니다길 위에 섰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길 위에서 내가 얻은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길 귀신에게 인사하기. 그 버릇의 이름입니다. 처음 나는 눈을 감고 터벅터벅 걸으며 온몸에 쏟아지는 햇살의 감촉을 느낍니다. 장마 비 뒤 끝에 떨어지는 햇살의 감촉은 나무 이파리 사이를 스치는 바람의 감촉만큼 상큼하지요. 나는 내 몸에 살을 부비는 햇살들에게 말합니다. 고마워.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게 해주어서. 그것은 내가 햇살들에게 건낼 수 있는 최고의 인사말입니다. 길 위에 서지 않으면 밥을 얻을 수도, 사랑을 만날 수도, 새로 핀 꽃향기를 맡을 수도 없으니까요. 새로운 도시로 여행 할 수도, 꿈을 꿀 수도, 시를 쓸 수도 없을 테니까요.

햇살과의 인사가 끝나면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습니다. 제일 먼저 흙냄새를 맡고, 풀냄새와 꽃냄새, 잘 자라고 있는 농작물의 냄새를 맡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가장 사랑스러운 냄새는 바로 흙냄새입니다. 흙이 없다면 우리들 삶의 시원도, 그 종착지도 없을 것입니다. 햇살이 아무리 좋고 바람이 아무리 고슬해도 흙이 없으면 다 그만이지요. 나는 눈을 감은 채 길섶을 따라 걸으며 또 한번 말합니다. 고마워. 우리를 머물 수 있게 해주어서. 그럴 때 나는 흙이 내게 전해주는 아주 따스하고 가벼운 생의 진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살아있음이란 내게 햇살을 등에 얹고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 일입니다.



햇살과 흙냄새 다음 차례는 바람입니다. 형체가 없지만 바람은 우리가 가는 곳을 이미 알고 있고 우리가 지닌 꿈의 내면에 한없는 설렘을 불어 넣어 줍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우리를 조금 외롭게 만드는 것도 바람이고, 그 외로움을 이겨내게 해주는 것도 바람입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지? 길 위에서 우리가 부딪는 그 근원적인 의문은 기실 바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나는 비로소 눈을 뜨고 길섶의 풀꽃 몇 송이를 꺾어 허공에 뿌립니다. 그 꽃들을 공중에서 잠시 춤추게 하는 것, 그 꽃의 살 냄새를 가까운 들과 마을로 흩뿌리는 것. 그것이 바로 바람이지요. 나는 인사를 건넵니다. 고마워. 늘 내 곁에 머물고 있어서.


길귀신이라는 말을 듣고 조금 움찔했을 이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냥 길동무라고 해도 좋겠지만 이들이 이 지상에 머물었을 시간을 생각하면 동무라는 말이 한없이 친근하고 포근해도, 그냥 귀신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은 것입니다. 길 위에 서면 나는 이 셋의 사랑스런 길 귀신들에게 내 마음의 혼을 모아 다정하게 인사하는 것입니다.

AD

"언젠가 생의 정처를 이곳에 부리리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나는 지금 863번 지방도로에 들어섰습니다. 처음 이 도로와 조우했을 때 나는 이 길의 길 귀신들이 내게 지극히 우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멀리 순천만의 갈대밭 이 보이고 붉은 흙의 빛깔과 냄새가 포근했지요. 바람은 온갖 종류의 꽃냄새들로 내 온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와온이라는 이름의 포구에 들러 그곳의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없이 펼쳐진 개펄 위에 떨어지던 저녁의 햇살들은 이상하게도 내게 희망이라는 느낌을 전해주었지요. 아침햇살이 아닌 저녁햇살이 희망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와온臥溫, 따뜻하게 누워있는 바다, 라는 그 이름의 의미가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언젠가 생의 정처를 이곳에 부리리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