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K포커스]한은에 손 벌리는 정부…'20조' 법정적립금도 넘볼까
정부, 한은 '마이너스 통장' 누계액 증가
쓸 돈 많은데 세수 부족하니 대출 늘어
'세수 펑크' 우려 큰 만큼 올해도 불안
당정, 20조 넘은 한은 적립금도 넘볼까
지난해 정부가 한국은행에 빌린 '일시 대출금' 누적액이 1년 새 4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돈을 써야 할 곳은 많은데 당장 세수가 부족하다보니 한은에서 빌려 쓰는 금액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올해는 경기둔화와 각종 세제 감면으로 세수가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는 금융불안을 막기 위한 유동성 공급과 경기 활성화 등에도 나서야 하는 만큼 한은 대출 금액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3일 한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정부는 한은으로부터 총 34조2000억원 규모의 일시 차입금을 조달했다. 누계액 기준으로 보면 2021년(7조6000억원)에 비해 26조6000억원 증가했다. 코로나19가 확산했던 2020년(102조9000억원)에 비해선 크게 줄었지만 2016년(11조4000억원), 2017년(8조원), 2018년(1조원) 등 예년과 비교하면 크게 늘어난 금액이다.
한은 '마이너스 통장' 사용 늘리는 정부
한은 대출금은 정부에게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이다. 한국은행법 75조에 따르면 한은은 정부에 당좌 대출이나 그 밖의 방식으로 여신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 한도인 50조원 내에서 이자(직전 분기 마지막 월 중 91일 물 통화안정증권 일평균 유통수익률+0.1%포인트)만 내면 자유롭게 한은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
정부는 '한은 대출을 받기 전 우선 재정증권 발행 등을 통해 조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일시 차입이 기조적인 부족 자금 조달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큰 의미는 없다. 그렇다보니 지난해처럼 급하게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하거나 예상 못 한 금융시장 불안으로 유동성 공급이 필요할 때는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한은 차입금이 많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올해는 고금리에 따른 경기둔화와 부동산 경기 침체, 감면정책 등으로 세수가 예상보다 줄어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한은 일시 대출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올해 국세감면액 전망치는 69조3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상반기에 재정을 조기집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세입은 세출하는 것에 맞춰서 들어오는 게 아니니 세입, 세출 시차를 맞추기 위해 한은 대출을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돈 쓸 곳 많은데…세수는 펑크 우려
정부는 이미 올해 1분기에도 상당한 금액을 한은에서 빌린 것으로 알려졌다. 단기자금시장에선 이 차입금이 풀리면서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유동성 경색 국면이 다소 완화됐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은 관계자는 "상반기에 경기가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정부가 재정을 조기집행한 영향이 있는 것 같다"며 "또 납부기한이 3월인 법인세가 들어오기 전 한은 차입금을 활용한 부분도 있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가 한은 대출금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아직 물가상승세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출로 조달한 돈을 너무 많이 풀면 인플레이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정부의 재량권을 위해 한은 발권력을 남용한다는 우려도 있다.
특히 정부 예상과 달리 세수가 크게 적으면 차입금을 제때 갚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정부는 2004년 한은에서 1조원을 대출받았지만 정해진 기간 내에 갚지 못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만기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만기 연장을 요청했다가 한은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정부는 유동성 위기가 아니라 세입과 세수간 미스 매치로 인한 해프닝이라고 해명했으나, 사실상 채무불이행에 빠졌던 셈이다.
한은 적립금 '20조' 돌파
일각에선 정부의 세수 부족이 심각해질 경우 이번에 처음 20조원을 돌파한 한은 적립금에까지 당정의 손길이 뻗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은은 당기순이익이 생기면 법정적립금(당기순이익의 30%)과 임의적립금으로 일부를 적립하고 나머지는 정부에 세입으로 납부한다. 적립금은 혹시 모를 위기 상황에 대비한 비상금으로, 지난해 말까지 총 20조1379억원이 쌓였다.
적립금 규모가 상당하다보니 경기가 침체하거나 정부의 세수 부족이 우려되면 여당을 중심으로 한은 적립금을 경기 활성화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됐다. 2021년 초에도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에선 "한은이 적립금을 쌓아두는 게 옳지 않다"며 당시까지 쌓인 약 17조원의 적립금 중 일부를 코로나19 지원에 사용해야 한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은은 이 적립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한은 당기순이익이 크게 늘면서 적립금이 많이 쌓인 것은 맞지만, 추후 발생할 수 있는 한은 적자에 대비한 돈인 만큼 목적 외 용도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설명이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으로 글로벌 금융 불안이 커지고 있어 적립금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는 분위기다. 한은은 지난해 2조5452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는데, 이는 2021년보다 68% 감소한 것이면서, 2014년 이후 가장 나쁜 실적이다.
금융 불안 확산…"적립금 더 늘려야"
한은 내부에선 적정한 적립금 규모를 총자산 대비 5% 수준으로 보고 있다. 2004~2007년 연속 적자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은이 내부적으로 산정한 기준이다. 지난해 말 총자산(582조8261억원)으로 계산하면 이 비율은 아직 3.45%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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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관계자는 "(한은에) 손실이 발생하는 쪽으로 국제 금융시장 환경이 조성되면 한두 해 만에 끝나지 않고 3~4년 이상 가는 경우가 많다"며 "그럴 때 적립금에서 손실을 보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금액으로 보면 20조원이 크지만 그만큼 한은의 외화자산 규모도 늘어나고 있다"며 "손실은 자산 규모에 비례해서 늘어나기 때문에 적립금이 충분하다고 보긴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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