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사진=대법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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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선포된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구금됐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3년 긴급조치 9호를 위헌·무효로 판단하고도, 2015년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행위라는 이유로 민법상 불법행위 성립을 부정했던 대법원이 7년 만에 입장을 바꿨다.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금됐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본인, 가족, 상속인 등이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사건 상고심 선고기일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판결 중 원고 양모씨를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에 대한 부분 및 양씨 본인의 위자료와 상속분 청구 부분을 파기하고, 이 부분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의 발령과 적용·집행에 관한 국가작용 및 이에 관여한 공무원들의 직무수행은 법치국가 원리에 반해 유신헌법 제8조가 정하는 국가의 기본권 보장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서 '전체적'으로 봐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그 정당성을 결여했다고 평가되고, 그렇다면 개별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돼 현실화된 손해에 대하여는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어 "이와 달리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 및 적용·집행행위가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서 말하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한 종래 대법원 판례를 변경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양씨는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지정돼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재판상화해의 효력이 인정돼 하급심에서 각하 판결을 받았던 원고다.


대법원은 양씨 본인의 위자료 청구 부분은 2018년 헌법재판소가 민주화보상법 제18조 2항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 중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볼 근거가 사라졌다고 판단 "권리보호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다는 원심판결에는 권리보호의 이익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임이 명백하고 긴급조치 9호 발령으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그에 따른 강제수사와 공소제기, 유죄판결의 선고를 통해 현실화됐다"며 "이러한 경우 긴급조치 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봐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그 직무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서 위법하다고 평가되고, 긴급조치 9호의 적용·집행으로 강제수사를 받거나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함으로써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판단했따.


또 재판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그 발령행위만으로는 개별 국민에게 손해가 현실적으로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긴급조치 9호를 그대로 적용·집행하는 추가적인 직무집행을 통해 그 손해가 현실화된다"며 "영장주의를 전면적으로 배제한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이므로, 그에 따라 영장 없이 이뤄진 체포·구금은 헌법상 영장주의를 위반해 신체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직무집행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또한 수사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본질적으로 침해됐음에도 수사과정에서의 기본권 침해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은 채 위헌·무효인 긴급조치를 적용해 내려진 유죄판결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나아가 이 사건과 같이 광범위한 다수 공무원이 관여한 일련의 국가작용에 의한 기본권 침해에 대해서 국가배상책임의 성립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전체적으로 봐 객관적 주의의무 위반이 인정되면 충분하다"며 "이와 달리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 및 적용·집행행위가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서 말하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한 대법원 판결들은 이 판결의 견해에 배치되는 범위에서 이를 변경한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대통령의 독립적인 불법행위에 의한 국가배상책임 성립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개인이나 유족이 대통령 개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김재형·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은 다수 재판관과 다른 의견을 냈다.


법관의 독립적인 불법행위 책임에 대해서도 다수 재판관은 인정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이날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판결에는 소급효가 없기 때문에 이미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 패소 판결이 확정된 피해자들은 구제받기 어려울 전망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종래 대법원은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이 그 자체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 긴급조치 9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이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며 "이번 판결을 통해 판례를 변경함으로써, 긴급조치 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으로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봄으로써, 과거에 행해진 국가 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에 대한 사법적인 구제를 인정했다는 데 이번 판결의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의 원고들은 1970년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체포·구금됐다가 풀려나거나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한 본인 내지 상속인들이다.


1975년 5월 제정·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 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거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청원·선동·선전하는 행위, 학생의 집회·시위 정치관여 행위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등 내용을 담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13년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입법목적의 정당성과 방법의 적절성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되고, 헌법개정권력의 행사와 관련한 참정권,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영장주의 및 신체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하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며 위헌 결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대법원도 "긴급조치 9호는 그 발령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 제53조가 규정하고 있는 요건 자체를 결여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이자 유신헌법과 현행 헌법이 규정한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와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청원권,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무효이다"라고 판결했다.


이에 피해자들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법원의 형사보상결정에 따라 형사보상금을 받았다. 이후 피해자들은 긴급조치 9호로 인해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2013년 9월 국가를 상대로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2015년 대법원은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며 정부의 손해배상책임을 부정했다.


이처럼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 행사에 따른 정부의 손해배상책임을 부정했지만, 이후 일부 하급심에서는 대법원의 결론과 다른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사건의 원고들은 주위적으로는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 자체가 위법해 불법행위가 성립한다는 이유로, 예비적으로는 긴급조치 9호에 따라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해 수사를 진행하고 공소를 제기한 수사기관의 직무행위나 긴급조치를 적용해 유죄 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가 민법상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해 직접 피해를 당한 본인들에게는 소득 상실분(일실수입)과 위자료를, 가족 등 나머지 원고들에게는 위자료를 배상해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앞서 1심과 2심은 기존 대법원 판결을 들어 원고들의 주장을 배척했다.


비록 긴급조치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무효로 선언됐다고 하더라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은 국가긴급권의 행사에 관해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므로,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또 당시 시행 중이던 긴급조치에 의해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해 수사를 진행하고 공소를 제기한 수사기관의 직무행위나 긴급조치를 적용해 유죄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는 유신헌법 제53조 4항이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이 선언되지 않았던 이상,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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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사건을 접수한 뒤 전원합의체에 사건을 회부해 심리해온 대법원은 이 같은 2심 판결을 뒤집었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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