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200주년 맞는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

[류태형의 객석에서] 독일의 견고함과 프랑스의 섬세함
AD
원본보기 아이콘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었다. 2021년은 피아졸라 탄생 100주년 생상스 서거 100주기였다. 코로나로 인해 공연이 취소되거나 변경돼 공연장에서 이들 작곡가들의 음악을 생각보다 충분히 듣지 못해 아쉽다.


그렇다면 올해 클래식 음악계의 초점은 어느 작곡가에게 모아질까. 탄생 200주년을 맞는 세자르 프랑크(Cesar Franck, 1822~1890)가 그 주인공이 아닐까 한다. 2022년 들렀던 공연장에서 처음 들었던 프랑크의 작품은 ‘전주곡, 코랄과 푸가’였다. 지난 2월 10일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연주했다. 명상적이고 심오한 곡의 여운이 오래 남았다.

프랑크는 1822년 12월 10일 벨기에 리에주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약했다. 어린 시절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다. 열두 살 때 리에주에서 콘서트를 열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피아니스트로 키우려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강압적이고 완고한 측면은 베토벤의 아버지와 오버랩된다. 리에주 왕립음악원을 13세에 마치고 파리로 이주해 안톤 라이하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구노, 베를리오즈, 리스트를 가르쳤던 체코 출신의 작곡가였다. 15세 때는 파리음악원에 입학해서 작곡과 피아노, 오르간을 배웠다. 피아노 연주로 1등상, 오르간 연주로 2등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여느 파리음악원 재학생과 마찬가지로 로마 대상을 목표로 공부했는데 1842년 음악원에서 퇴학 당한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아버지가 프랑크의 작곡 솜씨를 폄하한다고 여긴 음악평론가와 갈등을 빚었고, 그로 인한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류태형의 객석에서] 독일의 견고함과 프랑스의 섬세함 원본보기 아이콘

벨기에로 귀국한 프랑크는 환영받을 줄 알았지만 기대와 달라 실망했다. 비평가는 그에게 무관심했다. 궁정에서 지원금을 받는데도 실패한 그는 2년 뒤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돈을 벌기 위한 외부 레슨과 개런티가 작은 소규모 연주회를 열면서 어렵게 생활했지만 이 시기 프랑크에게는 득이 됐다. 파리 음악원에 복학하고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트리오를 완성하고 인정받았다.

1845년 완성한 오라토리오 ‘루트’가 공개 초연에서 비판을 받자 프랑크는 작곡가로서의 공개 활동을 접고 교사와 반주자로 생활했다.

이 무렵 프랑크는 제자 중에 두 살 연하인 펠리시테 사이요와 연인 사이가 됐다. 음악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펠리시테의 가정은 위압적인 아버지로부터의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아버지는 당연히 둘의 교제를 결사반대했다. 작곡한 악보에서 펠리시테에게 헌정하는 내용을 읽은 아버지가 악보를 찢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프랑크는 기억을 되살려 다시 악보를 완성하고 그 위에 헌사를 적어 펠리시테에게 보냈다. 이후 가출한 프랑크는 펠리시테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돌아가지 않았다.


생 클로틸드 성당의 1859년 카바예 콜 오르간.

생 클로틸드 성당의 1859년 카바예 콜 오르간.

원본보기 아이콘

펠리시테에게 청혼한 프랑크는 1848년에는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하며 아버지와 연을 끊다시피 했다(결혼식 때에는 어느정도 화해를 했는지 부모가 참석했다고 한다). 프랑크가 결혼한 장소인 노트르담 드 로레트 교회는 그의 일터가 된다. 오르가니스트 보조였던 그가 정식 오르가니스트를 맡았다. 1853년 제1오르가니스트로 옮겨간 생 장 프랑수아조 마레(Saint-Jean-Saint-Fran?ois-au-Marais) 교회에는 오르간 제작의 명인 아리스티드 카바예 콜이 설치한 1846년제 최신식 오르간이 설치돼 있었다. 이 소리에 홀딱 반한 프랑크는 “새로운 오르간은 오케스트라 같다”고 말했다. 카바예 콜과 협력관계를 맺은 프랑크는 카바예 콜 제작 오르간을 널리 알렸다. 프랑스 각지의 교회를 찾아다니며 낡은 오르간을 새 악기로 바꾸는 사업을 후원하고 직접 연주도 했다.


1858년에는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임지인 생 클로틸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평생 머물렀다. 이 성당에 새로 설치된 카바예 콜의 오르간은 3단 손 건반을 갖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프랑크는 이 오르간의 감촉까지 좋아해서 플레옐 사에서 연습용 발 건반을 구입해 집에서도 오르간을 연습했다. 이 오르간의 아름다운 울림에 걸맞은 빼어난 기교로 프랑크는 즉흥연주가로서 또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시기의 작품 중 ‘3성 미사곡’이 유명하다. 이 곡은 1861년 초연됐을 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나중에 너무나 유명해지는 ‘파니스 안젤리쿠스(생명의 양식)’이 여기서 태어났다.


‘오르간을 위한 6개의 소품’(1860~1862)은 프랑스 오르간 예술사 최초의 걸작이며 멘델스존 이후 작곡된 가장 중요한 오르간 음악으로 손꼽힌다. 이 곡들 중 ‘전주곡, 푸가와 변주곡’Op.18과 ‘교향적 대곡’Op.17은 프랑크의 오르간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프랑크의 오르간 즉흥연주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생 클로틸드 성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866년 4월 일요 미사 성가대 자리에는 프란츠 리스트가 앉아 있었다. 그는 “바흐 이외에는 비길 데 없는 오르가니스트”라고 프랑크를 찬양했다. 한 달 뒤에는 리스트가 생 클로틸드 성당에서 프랑크 오르간 작품을 소개하는 연주회를 기획했고 음악잡지에도 크게 보도됐다. 프랑크는 독일에서 활동하던 한스 폰 퓔로의 연주를 들으며 기뻐했다. 1869년 프랑크는 노트르담 성당에서 안톤 브루크너의 연주를 듣고 독일의 오르간 음악과 해석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1887년 촬영된 세자르 프랑크의 사진.

1887년 촬영된 세자르 프랑크의 사진.

원본보기 아이콘

이후 오르간곡과 교회음악을 작곡하며 시간을 보냈고 1872년에는 파리 음악원 오르간과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오라토리오 ‘속죄’와 ‘8개의 행복’은 초연에 실패했다. 1879년 앞서 언급한 피아노 트리오 Op.2가 드디어 초연되고 1880년에는 생상스가 피아노를 치며 피아노 5중주가 초연됐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다.

1882년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1884년 교향시 ‘귀신’을 완성한 프랑크는 피아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1884년 ‘전주곡, 코랄과 푸가’, 1885년 ‘교향적 변주곡’등 명곡들이 태어났다. 아마도 프랑크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졌을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는 1886년 완성됐다. 벨기에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작품으로 그에게 헌정됐다. 이자이는 이 작품을 브뤼셀과 파리에서 자주 연주했고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1888년에는 교향시 ‘프시케’와 교향곡 D단조가 완성됐다. 프랑크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교향곡 D단조는 1889년 초연됐으나 평이 좋지 않았다. 최후의 대작인 현악 4중주 D 장조는 1890년 살 플레옐에서 열린 국민음악협회 연주회에서 초연됐다. 이례적으로 갈채를 받았던 프랑크는 “이제야 세상이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890년 프랑크가 타고 가던 마차와 말이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후 건강이 악화된 프랑크는 11월 8일 영면에 들었다. 그의 오르간 음이 서려있는 생 클로틸드 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됐고 현재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혀 있다.


프랑크는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던 작곡가였다.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에는 어둠 속에 반짝이는 투박한 보석처럼 진실함과 감미로움이 서려 있다. 그는 베토벤 이후 독일 낭만주의 음악, 동시대 리스트와 바그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고전주의적인 기본 위에 충실하고 실질적인 음악을 쌓아갔다.


세자르 프랑크의 무덤.

세자르 프랑크의 무덤.

원본보기 아이콘

프랑크의 가장 대표적인 음악적 특징은 순환형식이다. 전반에 악장에 등장한 주제의 일부나 전체가 후반 악장에서 재현되며 곡 전체의 통일을 도모하는 기법이다. 피아노 3중주와 바이올린 소나타, 교향곡 D단조 등은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바흐를 연구했던 프랑크는 대위법을 능숙하게 사용했고 푸가와 변주곡을 사랑했다. 선율에는 기품 있고 풍부한 서정이 서려있다. 큰 폭으로 상승과 하강하는 악상을 보여준다. 구성은 견고한 독일음악을 닮았고, 섬세하고 미묘한 감성은 프랑스적이다. 신비로운 정서는 낭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뒤에는 고결한 끝맛이 남는다.


프랑크는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해 프랑스 음악계에 기여했다. 뱅상 댕디, 에르네스트 쇼송, 앙리 뒤파르크, 기욤 르쾨 등이 그들이다. 이 악파를 ‘프랑키스트’라고 부를 정도로 프랑크의 작풍은 이들에게 이어졌다. 친구들과 제자들은 세자르 프랑크를 겸손하고 존경스러우며 부지런했다고 전한다. 프랑크의 제자로 노트르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된 루이 비에른은 “프랑크가 예술의 기품에 대해, 그 역할의 고귀함에 대해, 소리에 대해서 말할 때 뜨겁고 진지했고 사려 깊었다. 환희와 음울함, 장엄과 신비, 강렬함과 천진난만함... 생 클로틸드 성당에서 그는 이들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2022년은 누구보다도 세자르 프랑크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 연주회 프로그램에서 작곡가 프랑크의 이름을 찾아보자.

AD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